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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프지 않다 / 변애선

아프지 않다 / 변애선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기준은 무엇일까. 미칠 것만 같은 그리움의 척도일까. 사랑을 잃고 난 이후 죽을 것만 같았던 통증의 강도인가. 그 존재의 부재가 주는 하염없는 외로움일까. 평생 잊지 못하는 안타까움인가. 나에게는 그것이 참을 수 없는 마려움이었다. 터질 것만 같은 상태로 차마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한 채 몸부림을 치는 고통.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그토록 흠모하고 사모하였던 사람과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때는 이메일이 없었으니 분홍편지지에 푸른 잉크로 그리운 마음을 소나기처럼 적어서 보내는 나의 집요함에 그 사람도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 시절은 매 순간 그 사람을 먼빛으로나마 스치기라도 해보려는 심정으로 살았으니 그..

[스크랩] 내가 살아보니까 / 장영희

내가 살아보니까. . . . 장영희 오늘 아침에 일어나 아무런 생각 없이 집을 나서 아무런 생각 없이 학교에 도착해 무심히 차에서 내리다가 문득 가을을 만났다. 언제 어디서 떨어졌는지 퇴색한 플라타나스 잎 하나가 덩그마니 내 차 지붕 위에 얹혀져 있었다. 어느새 비껴 내리는 햇살은 한껏 부드럽고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냄새가 풋풋하고, 흰 구름 몽실몽실 피어있는 하늘이 예사롭지 않게 푸르렀다. 새삼 정신차려 유심히 둘러보니 이제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다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이 완연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마음이 이제는 차돌같이 굳어 아무런 틈새가 없는 줄 알았는데, 웬걸, 문득 휑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 가을이구나.... 나무와 풀들은 이 세상에서..

[스크랩] 예순이 되면 / 최민자

예순이 되면 최민자 예순이 되면 나는 제일 먼저 모자를 사겠다. 햇빛 가리개나 방한용이 아닌, 진짜 멋진 정장모 말이다. 늘 쓰고 싶었지만 겸연쩍어 쓰지 못했던 모자를 그 때에는 더 미루지 않으련다. 둥근 차양에 리본이 얌전한 비로드 모자도 좋고 햅번이나 그레이스 켈리가 쓰던 화사한 스타일도 괜찮을 것이다. 값이 조금 비싸면 어떠랴. 반세기 넘게 수고한 머리에게 그런 모자 하나쯤 헌정한다 해서 크게 사치는 아닐 것이다. 이마 위에 얹힌 둥그런 차양이 부드러운 음영을 눈가에 드리우면 평범한 내 얼굴도 조금은 기품 있게 보일지 모른다. 가을바람 가볍게 살랑거리는 날, 모자를 쓰고 저녁모임에 나가 나보다 젊은 후배들을 향하여 따뜻하게 웃어 주고 싶다.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대신 격조했던 사람들과 더 자주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