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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고뇌의 계절 - 유안진

wild rose* 2019. 10. 7. 04:19

사유와 고뇌의 계절 / 유안진



하늘은 깊이를 모를 정도로 푸르르고 또 높아지고 멀어진다. 이제는 야망과 정열로 치닫던 눈길을 거두어 들이고 사유와 고뇌의 눈 내리깔고, 젊음이 진하여 가을빛으로 물드는 풀섶을 따라 좁은 길을 걸으며 지내온 봄과 여름날을 새김질할 때다.

애인이여, 인생 20대의 우리들 찬란했던 꿈. 친구여, 인생 30대, 그 꿈을 실현코자 종횡무진 달음질치며 넘어지면 일어서서 다시 달음박질하던 용맹과 패기의 계절은 갔다.

이제 인생 40대, 꿈이나 사랑이나 그 번쩍이고 요란하던 삶의 비늘들이 아픈 기억의 조각처럼 조용히 떨어져 흩어지기 시작한다.

열번을 토해내던 불가마 같은 입술이 닫혀지고, 기인 침묵의 시간이 오고 있다. 이마에는, 귀 밑에는 솜털이 일어서며 소소리바람에 귀가 열릴 만큼 말은 이미 없어지고 마음은 비어있다.

가슴 속살에 스미어 젖어드는 빛에 정결한 마음 자리를 마련해 두고, 지나온 세월 몹시도 안타깝게 사랑하고 미워한 사람들의 이름과 애원하며 외쳐도 대답 없던 신의 이름까지도 떠올려 본다.

사랑이나 미움이나 지내 놓고 보면 모두가 후회스럽고도 또 왜 그리워지는지 살아온 세월은 알맞은 불행과 적절한 행복으로 물무늬 졌던 강물이었음을, 흙탕물도 흘러가는 동안 마알갛게 가라앉듯 고독과 오욕도 때가 지나면 드넓은 웃음을 마련하게 된다는, 이 지혜와 경륜마저 터득한 깊고도 그윽한 눈을 들어 비로소 발걸음 멈추고 하늘을 우러른다.

그러나, 늘 함박꽃 웃음 웃는 꽃처럼 즐거울 수 없고, 꽃이 지는 슬픔과 아픔의 자리에 열매가 열린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이런 눈을 뜨기까지 신은 어찌 봄철 또 여름철이란 길고 기인 세월을 거치게 하셨을까?

그리운 사람들, 멀리 있어도 소식이 없어도 가장 조용한 마음 자리 밝은 가을 달빛 어리고 맑은 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서 흔들리며 조용히 떠오르는 이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새삼 감사의 깊은 눈길을 보낸다. 질투도, 비아냥거림도, 거짓도, 우정도 모두 내 삶을 기름지게 했던 좋은 밑거름이었음을 이제와 알았다.

이제 나의 눈빛은 샛별처럼 초롱초롱하고 어둠 속 불빛인양 반짝이진 않는다. 지나치는 사람들, 낯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기쁨과 고뇌를 읽을 줄 아는 그윽하고 서늘한 중년의 깊이, 가을 날 물살 같은 울음도 가슴으로 삭일 줄 알만큼 인생의 멀리까지 와버린 눈이다.

이제 내 앞에는 뻗어 나간 세월이 휘어져 돌아오는 것 뿐, 그래 건네 줄 사람이 없어도 한 이삭 갈대꽃을 꺾어들고 서늘히 식은 이마 위에 별빛을 얹고 이상한 기쁨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놓을 것이다.

어줍잖게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다시 채우기 위하여 한 자루 촛불을 마련할 것이다. 소나기 지나간 바윗등처럼, 눈물이 씻어간 정결한 마음 자리에 살만하고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용기를 허락하고 거듭 허락하시는 신의 말씀 책을 펴놓을 것이다.

깊은 눈을 무겁게 감고 굳은 무릎도 꿇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