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D.H.로렌스
사랑은
이 세상의 행운이다. 그러나 행운이 성취의 전부는 아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헤어지는 일이 없다면 어찌 함께
모이는 일이 가능 하겠는가. 사랑 속에서 모든 것이 기쁨과 찬양으로 하나가 된다. 그러나 흩어지는 일이 없다면 어찌 하나로 뭉칠 수
있단 말이냐. 결합의 온전한 원 속에서 그들이 하나가 되면 사랑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사랑의 움직임도 호수와
같아서 썰물이 있어야 밀물이 있다.
따라서 하나로 합치는 일은 서로 헤어져 있을 때 가능하다. 심장수축은 심장이완에
의지한다. 밀물은 썰물에 의지한다. 우주적이며 온전한 사랑은 없다. 바다의 조수가 한꺼번에 온 지구상에서 만조가 될 수는 없다.
사랑이 구석구석을 어김없이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엄밀히 말해서 여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도착보다는 여행이 더 좋다). 이것이야말로 회의의 핵심이 된다. 사랑이 원래 상대적일 때 이것은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신념일 수 있다. 그것은 방편에 대한 신념이지 결코 목적에 대한 신념은 아니다. 사랑은 통합하는 힘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힘에 대한 신념이 된다.
어떻게 우리는 힘을 믿을 수 있을까? 힘은 수단이요 기능이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아니다. 우리는 도착하기 위해서 방황한다. 방황하기 위해서 방황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런 방황은 무의미한 짓이다.
그런데 사랑은 여정이요, 움직임이요, 하나로 합치는 속도인 것이다. 사랑은 창조의 힘이다. 그러나 모든 힘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긍정적이며 그리고 부정적인 양극성을 지니고 있다. 낙하(落下)하는 모든 사물은 지구에 대한 중력이 작용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지구는 중력의 반대 작용으로 달을 내동댕이쳐서 영겁의 시간 동안 천체 속에서 달을 궁지에 몰아 넣고 있다.
사랑도 이와 같다. 사랑은 정신과 정신이, 그리고 육체와 육체가 창조의 기쁨 속에서 서로 황급히 끌어 당기는 인력이다. 그러나 만약에 모든 것이 한 줄기 사랑의 탯줄로 연결된다면 그 이상 더 사랑이란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도착하는 일보다는 방황하는 일이 더 좋다.
왜냐하면 도달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넘어갈 수 있고, 새로운 초월 속에서 사랑을 포용할 수있기 때문이다.우리들 모두가 방황한 다음 도착한다는 일은 그지없는 기쁨이다.
사랑의 예속! 사랑의 예속 이상으로 더 고약한 유대가 또 있을까? 그것은 마치 밀어닥치는 조류 속에 담을 쌓는 일과 같다. 그것은 봄을 묶어 두려는 의지와도 같다. 5월이 6월로 녹아 흐르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아가위나무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심통과도 같다.
이 무한한 사랑, 우주적이며 그리고 승리에 넘친 이 사랑이 불멸에 대한 우리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옥과 속박이 아닌가? 영원이란 결국 끝없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가? 무한이란 결국 공간 속을 하염없이 달리는 일이 아닌가? 영원, 무한, 휴식과 도착의 영원한 사상. 이 모든 것도 끝내는 무한한 여정의 사상이 아닌가? 영원은 시간 속에서의 끝없는 여정이다. 무한은 공간 속에서의 무한한 여정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론을 제기하려해도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영원불멸도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사상 속에서는 같은 종류의 끝없는 계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계속하는 것, 영원히 지속되는 것 , 이 모든 것이 여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사랑은 목적지로 향하는 진행이다. 따라서 그것은 반대편 목적지로 부터 벗어나는 진행이다. 사랑은 하늘로 향해간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서 출발하는 것이냐? 지옥으로부터. 그곳엔 무엇이 있느냐?
무한성, 무한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그것은 막다른 길이다. 다시 말해서 끝간데 없는 심연이다. 그 심연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은 영원히 방황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쾌적한 담이 서 있는 그 막다른 길은 아마도 완전한 천당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온하고 낙원같은 평화의 막다른 길과 흠없는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또한 전진의 끝없는 심연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사랑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여정일뿐.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목적일 수 없다. 그것은 원초적인 혼돈의 상태로 뿔뿔이 흩어져서 방황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 원초적인 혼돈으로 부터 모든것은 창조 속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죽음도 또한 막다른 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도가니다. 목적은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사랑도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무한의 목적지도 아니고, 영원의 목적지도 아니다. 그것은 고요한 기쁨의 영역이다. 그것은 또 다른 축복의 왕복이다. 순수한 구심성(求心性)의 기적이면서 순수한 사면(赦免)의 안정상태인 장미꽃. 우리는 그 장미꽃과 같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완성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장미는 완성의 영역에서 완전 무결하다. 장미는 일시적인 것도 아니고, 공간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완성의 질을 품고 사면되어 있다. 사면의 순수한 편재(遍在)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미와 같다. 우리는 완성을 성취하고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사랑을 성취할 수 있고 초월할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아리따운 애인들에 의하여 성취하고 초월되었다. 우리는 마치 완전한 장미와 같다. 그것은 완전한 도달이다.
사랑은 여러갈래다. 사랑은 꼭 한 갈래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성하건 속되건 간에 남녀의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기독교적 사랑이 있다. (그대는 자기를 사랑하듯 그대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하여 신의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은 함께 결합하는 일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전한 열정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되는 두 종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완전한 생명의 고통이다.
그것은 심장의 수축이요 심장의 이완이다.
신성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은 점에서 무아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고 그와 하나가 되는 완전한 교류를 이룬다.
하나 속에 언제나 둘이 있다. 둘은 언제나 하나 속에 있다. 달콤한 영교(靈交)의 사랑과 그리고 감각적으로 완성되는 격렬하고도 만족스런 사랑은 하나의 사랑 속에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미꽃과 같다.
우리는 사랑 속에서 사랑을 초월한다. 사랑은 성취되고 초월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순수하게 접합된 둘이다. 우리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타인 속에서 마치 보석인 양 고립된 둘이다. 그러나 장미는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를 초월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피안에 있는 하나의 장미인 것이다.
(현대세계수필문학 63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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