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똥 속의 우주론 - 권 이 나
좀더 넓은 세상을 애들에게 보여주려 십몇 년 기다렸던 인도 여행,
정작 그 땅에 발을 딛고 서보니 진작에 그 세상을 봤어야 했던 사람은 애들 아닌 나였다.
같은 사물이라도 그걸 바라보는 각도가 사람에 따라 다르듯,
한 나라를 보고 접하는 내 마음과 시선이 남들과는 다를 것은 당연하지만,
붓다, 간디, 젊은 날 히피 시대,
실로 오랜 동안 우리 또래들의 우상이며 이상이었던 이 나라에 발을 딛고도,
환성을 지르기엔 내 심신이 너무 지쳐 있나.
작열하는 저 해와, 감탄과 흥분에 차있는 내 붙이들 옆에서
나 자신 왠지 한 발자국 떨어져
내가 저들과 함께 이렇게 웃으며 즐거워하며
절뚝거리지 않고 잘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우리 식구들에겐 큰 부주인 거다, 라는
생각을 무심코 하게 되는 것은, 그런 참 슬픈 생각이 왠지 드는 것은….
뉴델리에서 처음 어디로 향하는 기차 속
저것 좀 봐!
창밖으로 떠오르는 해를 가리키며 옆 좌석에서 남편이 날 깨운다.
몇 시간째 돌무더기만 보이던 펀펀한 들판에 드디어 해가 나타났다.
저 해는 확실히 더 빨갛다! 딴 데 것보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와 애들에게 뭔가 다른 걸 보여주려 이리도 애를 쓰는,
이 나라를 깊이 사랑하고 또 잘 아는 남편을 위해 이 여행에서 이제부터의 고민은,
그가 실망치 않도록, 되도록 눈에 띄게 내 감탄의 농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싯다르타의 나라 ―좌선을 하고 앉아 졸다
인기척이 나면 선(禪)을 하는 길가의 파트타임 구루들,
왕의 남자 공길이의 눈을 가진 은회색 말인지― 노새, 다람쥐, 원숭이, 개
그리고 기차 레일 위, 길 한복판 어디에나 염치없이 누워있는 소, 소, 소.
이 나라 소들은 눈이 중섭의 소마냥 선량하다.
개는 더하다, 여기 개는 눈을 안 뜬다.
늘어져 있어도 절 고아 먹으려 쫓아오는 이 없으니 그런가.
개는 짖지도 않고 눈도 안 뜨고 막 물어뜯지도 않는다.
내 눈에는 저 소도 원숭이도 또 개도 모두 철학자 같다.
허긴 부처도 저 비슷이 누워 뭔가 숙고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좌우간 눈에 보이는 모두가 그늘을 찾아 배를 깔고서 네 다릴 쭉 뻗고 늘어져 있다.
이 땅에선 시간(時間)도 그 어떤 것도 저들을 어찌할 수 없나보다…
삼륜 이륜 자전차, 마차, 자동차, 트럭, 버스, 자전거,
굴러가는 건 모조리 길에 나와 제각기 앞을 향해 빵빵거리며 돌진하는 이 나라의 길,
내 생전 첨 보는 이 아수라장, 길 전체가 싸우다만 전쟁터.
아사, 황사, 가뭄, 홍수, 개, 쇠, 원숭이, 나귀, 말, 노새,
다람쥐, 쓰레기, 말똥, 개똥, 소똥, 거지, 소음, 배탈, 설사, 모기, 말라리아,
염불 소리, 종 소리, 크락숀 소리, 소음, 꽃향, 나무향, 타블라, 시타르, 뽕작 노랫소리….
그리고 강렬한 색, 화가는 색(色)을 보기 위해서 인도를 가야 한댔다.
시가지 전체에 널려있는 불이 타오르는 듯한 색색가지 꽃과 옷과 물감들 새에서
그래도 내 눈에 비친 이 나라의 진짜 색은 타고 남은 잿빛, 은회색이었다.
색과 함께 거리엔 향 또한 진동을 한다.
한번은 향에 끌려간 적도 있다.
어디선가 나는 은은한 어떤 향!
어느 날, 그 향내를 따라 킁킁거리면서 주위를 잘 살펴보니
근처 나무 위에 별처럼 생긴 새하얀 꽃이 향을 풍기며 예쁘게 피어 있었다.
그 꽃의 이름은 후랑지판.
수선화를 닮은 그 겨울꽃의 감미로운 향은
둘레의 온갖 소음과 공해와 잡내에 치인 우리에게
한줄기 빛처럼 이곳 여정 내내 어딘가에서 풍겨와 모두를 기쁘게 해주었다.
세상의 폐차는 다 끌어다 모아 놓은 이 나라 길,
시발차들의 하염없는 크락숀 소리,
바퀴 달린 건 전부 길로 나와 빈틈을 비집고 다투어 액셀레이타를 밟는 데는
차가 가는 게 아니라 날아간다.
바퀴가 모자란지 그 중에도 유독 꾼들 거리는 우리 봉고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은 거의 차체뿐, 도어가 없다. 어떤 건 지붕도 없다.
그 말은 곧 난 냉방에 필요한 연료가 안 든다는 거다.
찌그러진 차체 위에 방짜처럼 온갖 꽃을 그리고 칠하고 걸고 붙였으니
어디 좀 긁혀도 티가 안 나고 원체 찌그러져,
달리다 받힌댔자 뽀개지기 전엔 모르니 수리비 또한 세이브 돼,
거기에 또 지붕도 트여 있으니 키 높은 작품을 옮길 수 있는
저기 저 차야말로 바로 내가 찾는 차,
거기다 열몇 명이 구겨 타도 잘만 굴러 간다니,
필시 저 차는 미래의 베히클, 나 저거 하나 있었으면… 침 흘리는 찰나,
빠앙 빵! 귀 때리는 크락숀 소리와 동시에,
운전대만 쥐면 사생결단 질주하는 거리의 똥차들이 행길 한복판에 덜커덩! 하고
한꺼번에 일제히 멎을 땐,
보면 자알 생긴 소가 우수에 찬 시선을 먼 곳에 주고서
지옥에서 갓 튀어나오는 우리 눈앞에 귀티 나게 폼 잡고 따악 누워 있다.
다행히 소가 있어 길 정리를 도와주니 저들은
이를 테면 이 아사리 판의 교통순경.
이럼에도 교통사고는 거의 없다니 나 같은 문화인은 놀랄 조짐이 보일 땐
아예 목에 두른 샤리를 얼굴 위에 확 덮고 그냥 두 눈을 감는 게 나았다….
이러며 도착한 곳은 아그라. 길 어구에 줄줄이 서있는 꽃마차들,
은방울 금방울을 주렁주렁 목에 건 그림 같은 회백색의 말들 사이를 지나
벽돌로 높게 쌓은 웅장한 마할의 입구에 도착했다.
황사에 공해에 어두운 날씨.
멀리 회색빛의 안개 사이로 새 하이얀 궁전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멀리서 보면 가위로 오린 하이얀 종이배가 하늘 가운데 둥 떠있는 것 같다.
흰 대리석으로만 지은, 아무도 산 적이 없다는 어느 사랑받은 여인의 무덤, 타지마할.
나는 그 앞에 마치 넋 빠진 것처럼 멀거니 서서 신기루를 보듯이 몽롱해진 눈으로
안개 속 그 종이배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가슴이 꽉 차는 듯하다. 신비(神祕)하다….
저거구나 ‘동방(東邦)’의 ‘혼(魂)’이라는 게….
그날 저녁 우리는 베나레스에 떨어졌다.
여기서 두 밤을 지낸다.
이곳은 자동차 아닌 종교 의식의 아수라장.
거리마다 향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며 곳곳에 염불 소리가 귀청을 찌른다.
좀 잠잠해진다 싶으면 또 ‘아으 아 아…’ 신도들이 도시 전체에 스피커를 매달아 놓고
노랜지 주문인질 계속 외어댄다.
새벽에도 어김없이 ‘오옴…’ 소리에 깬다.
선(禪)의 도시 베나레스는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은 아닌가보다….
밤새 눈 못 부치고 갠지스 강가로 산보 가는 길,
여긴 인도와 차도가 따로 없다.
소똥으로 다져진 길을 소와 차와 내가, 모두가 함께 얽혀서 지나간다.
어느 누구 불평하고 화내지 않는다.
모두가 묵묵히 자기 길을 지키며 숙명처럼 슬픔을 감수한다.
누가 이 속에서 우주를 논할 것인가?
사이비들의 용어, 우주(宇宙). 이곳에 서면 갈 길은 아무데도 없고 또 어디에나 있다….
우주란 각 인간의 눈앞에 어김없이 놓여있는 바로 이 아수라장 같은 거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광경은 참 정말 비참하다,
얼마나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가난에 쩐 저들에게 우리는 루피를 쥐고 모른 척,
등 돌리고 지나가는 치졸한 백색인종일 뿐…
배 타러 가는 길 내내 나도 모르게 몸을 추스르고 걸었다.
베나레스에서의 마지막 날. 갠지스강의 새벽,
배 위에 걸터앉았다 어둠속에 목욕재계하는 베나레스 사람들이 보인다.
이 백성들이 믿고 의지해오는 저 강에 대한 ‘믿음’이
아마도 헐벗은 그들의 등받이가 되어주는가.
그들의 처연한 몸가짐에는 우리가 갖지 않은 것—디그니티가 있다.
품위가, 몇 겁을 버텨온 프라이드가 있다….
물 안 여기 저기 백발의 신도들이 굽은 허리로
두 손을 정히 모으고서 성실히 기도를 한다….
죽을 때가 되면 이곳을 들른다지.
남루한 옷가지를 정히 빨아 널어놓고 두 손 모아 참배하는 그들의 몸에
푸욱 배인 전통 의식에 대한 의리, 충심(衷心)….
온 시가를 진동하는 소똥 개똥 냄새 위에
프랑지판, 꽃향기 한줄기. 노 젓는 소리, 철새들 나는 소리,
강물 위로 띄워 보내는 촛불타는 소리, 시구 태우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오옴…. 저건 간밤에 들리던 기도 소리다!
그게 아마 새벽녘이었지.
이들에겐 성스런 귀에 익은 소리들이 나처럼 지쳐있는 여행자에겐
견디기 힘든 소음이기도 하다,
밤에는…. 쪽배를 타고 노를 젓고 있자니 새떼들이 우리 곁을 지나간다.
멀리 장작불 연기가 피어오른다. 시구를 태운다더니 저 건가보다….
꽃과 시구를 같이 떠나보내는 아름다운 풍습…
그들은 울지도 또 별로 슬프지도 않은 것 같다….
부지런한 여인들은 벌써 이 새벽에 빨래를 하여 계단 위에 널고 있다.
꽃과 시구가 하나둘 흩어지며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간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때가 오면 마지막으로 찾아간다는 영혼의 장소 베나레스를 떠나
우리는 캘커타로 가는 봉고차에 올랐다.
캘커타. 벵갈 말을 쓰는 이곳은 문화(文化)의 도시.
소가 없으니 훨씬 질서 있고 깨끗해 보인다.
우리는 꽃시장과 조각가촌과 타고르의 생가와
불교 유적을 아침에 모두 돌고 나서 오후에는 배를 타기로 했다.
부둣가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이 다리는 폭격에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철교이며
수만 명의 사람들이 아침에 건너와 일을 하고서
저녁이면 이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간단다.
우리 일행도 철교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늙은 할아버지가 머리 위에 바나나가 가득 담긴
집채만 한 바구니를 이고 내 쪽을 향해 걸어온다.
저 무거운 걸 어쩌자고 아이구….
바나나, 꽃목거리, 밥풀떼기, 달걀, 옷, 과일, 신발,
수많은 인파들이 그렇게 바리바리 뭘 지고 이고
이쪽으로 부지런히 걸어온다.
머릿속으로 퍼뜩 6.25 동란 당시 한강 다리 광경이 지나간다….
바로 저거였었겠지. 우리는 훨씬 더 처참했었겠지, 추웠으니까. …
할머닌 저기다 이불까지 지고 걸었다지…
이불 한 채에 수저 한 벌… 폭격… 혹한 속 1.4후퇴,
흥남 철수, 피난, 동강난 한강다리, 떠내려가는 피난민,
갈라져버린 나라, 이산….
내가 겪어보지 않은 장면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생생히 내 눈앞을 스쳐가는 것이 이상하다.
헌데 더 놀라운 것은 저렇게 무거운 걸 지고 걷는 저들,
아이, 젊은이, 늙은이, 청년들은 마치 다리 저편에 기적이 기다리고 있는 듯
밝고 희망찬 얼굴로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거다….
생기가, 긍정적인 무언가가,
힘이 넘친다! 나는 순간 생각했다.
이들은 분명 일어날 것이다. 꼭 잘 될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된다….
그러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먹먹해지는 가슴,
나는 긴긴 다리를 지나는 동안 강바람에 펄렁대는
내 마후라 속에 얼굴을 푹 파묻고서
나도 모르게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춰보려 어느새 애까지 쓰고 있었다.
십여
일은 방대한 인도를 보기엔 너무나 짧았지만
공항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가이드를 따라 움직여야 했던 매일매일의 여정은
상상외로
힘겨워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것들 사이에서 놀라고 감탄하고 질리곤 하기를
고단한 하루일정에 여행이 끝날 때쯤은 빨리 내 방하고 내
밥이 그리워졌다.
아마 이 나라를 잘 이해하는 내 친구들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소똥과 소음과 가난과 공해 속에 본 것 없이 진저리만 치다 돌아왔을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이 여행의 종착역 방글라데시, 친구가 기다리는 다카.
우리 아이들은 맨 먼저 옷감시장을 찾았다.
다카에선 본만 있으면 원하는 옷을 하루 만에 똑같이 만들어준다고 들었다나.
가져온 바지 등속을 들고 우리는 옷감시장으로 향했다.
다카의 문제는 교통. 안내는 차 보단 자전차가 낫다고,
우리 넷과 안내자 둘, 모두 여섯이서 자전차가 두 대면 된다며
우리를 한 자전차에 셋씩 두 대에다 나누어 태웠다.
운전수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빈 틈새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자전차 위에 앉은 채 행여 굴러 떨어질까 받힐까,
나는 남편 무릎을 꼭 쥐고 병신처럼 오금을 조이며 붙어 가는데,
가만 보니 운전수는 커브를 틀 때마다 땅에 내려 우리가 탄 무거운 자전차의 핸들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온몸으로 밀고 끌며 커브 길을 돌아간다!
사람 셋이 좀 무거운가.
그리고선 다시 올라타 페달을 밟는 데는 깡마른 그의 앙상한 무릎뼈가
힘겹게 움직이며 살 위로 불거져 나오는 걸 보면서 나는
깜짝놀라 뒤에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이봐요! 기다려요! 위 아 투 헤비!!”
그는 돌아보고 웃으며 ‘저기만 돌면 다 왔다’고
도리어 고갤 저으며 날 안심시킨다.
차마 앉았을 수가 없었다.
하나, 기껏해야 둘이 앉는 비좁은 자전차에 돈 몇 푼 아낀다고
한꺼번에 셋씩이나 올라타고서 흔들거리는 시트 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유유히 갈 수 있는 우리들.
저 뒤차에 따라오는 우리 애, 내 아이들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
이윽고 시장입구에 다다랐다.
차 두 대가 시장 앞에 다다르자 안내는 후다닥 택시비를 지불하고 사라진다.
남편, 소생, 안내원, 누구도 팁 한 푼을 그에게 안 준다.
이 나라는 원래 그렇단다…
나는 뛰어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떻게 그때 내 수중엔 팁으로 줄 돈조차 한 푼 없었나….
“영 맨! 아임, 아임 쏘리, 아임 쏘 쏘리….”
그때, 우릴 안내하는 깍쟁이 가이드가 지불 벌써 다 했으니
빨리 따라 오시라며 옷감시장 문안으로 홀연 꺼진다.
나는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그의 손을 꼬옥 붙잡고 아니 그냥 꼬옥 붙들었다….
나를 보고 고갤 끄덕이는 선량한 그의 눈을 보니
그냥 돌아서지지 않았다.
내 자신이 정말 너무나 환멸스러웠다….
나는 그날 그 차를 타고 이 헐벗은 사람들 앞에 ―
그들은 대개가 신발도 없다―
좋은 신발 갖추어 신고 입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우리,
이 우리가 누군지 똑똑히 보았다.
멀건 피부를 한 우린 훠킹 화이트, 훠킹 차이니즈!
저들의 해맑은 미소, 순한 얼굴 앞에, 헐벗은 저들 앞에, ‘진짜’ 거지는 ‘나’였다,
내 남편 내 아이들 온 가족 다 싸그리 그저 한심한 그지, 훠킹 그지일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엔 유람 차 다카 시,
공해에 쩔어 시꺼멓게 돼버린 강을 쪽배를 타고 건너갔다.
십몇 척은 족히 될까.
폭 좁은 부둣가에 크고 작은 배들이 빽빽하게 열을 지어 대어져 있었다.
그 배들은 금방 내려 앉을 듯 하나같이 헐고 녹슬고 금이 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저 배는 어디서 온 거냐’고 물었다.
“저 배들은 모두 메드 인 방글라데시지요.
우리나라는 배를 꽤 잘 만듭니다요.”
자랑스런 어조로 그들이 대답한다. …
나는 벗겨진 칠 사이로 뻘겋게 녹이 스며들어
금방이라도 물에 잠겨버릴 듯한 헐어빠진 대형의 배들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냥은 저래도 우리 꺼보단 낫다.
이 나라에는 적어도 생목숨 300명 삼키는 그런 배는 없다.
조선 사업 랭킹 1위 우리가?
그래서 삼백(三百)이나 되는 꽃송이들의 목숨을
속수무책으로 그렇게 떠나보내 버렸나.
가여운 혼들….
내 자신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몇 명 눈알은 분명 내 손으로 뽑아버렸다….
떠나기 전날 마지막 저녁은 영화를 하는 친구네 집에서 지냈다.
그가 묻는다.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어디더라? 선뜻 대답이 안 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인도여행에 대한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소똥과 쓰레기와 공해와 거지와 소음과 뭐와,
본 적도 없는 온갖 황당한 것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무제한―무질서 속에
경이와 경악 사일 오갔던 터에 그렇게 단숨에 댈 만큼 내가 좋아한 곳이 있기나 했나?
이 나라에 와서 내가 본 건, 그것도 마음 깊숙이 느낀 건,
솔직히 도시도 꽃도 궁전도 아닌, 이들의 후한 인심이었다….
이번엔 그 딸이 묻는다.
“홧 아유 두잉?”
나는 거침없이 답했다.
“아임 두잉 낫팅!”
이해 못한 그 딸이 또 묻는다.
“아니 당신은 예술을 한다 들었는데요?”
나는 더 똑똑히 발음했다.
“노노 아임 두잉 낫팅, 낫팅!”
난 그리고 또 말을 이었다.
“아 임 낫 팅!”
이 모두가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다.
“와이?”
이번엔 그 아비가 되물었다. 와이? 왜냐고? …그건 설명이 안 되지….
시간과 욕심을 초월한 영혼의 자유가, 예
술의 본질이 이 거리에 있는데 거리 전체가,
이곳의 삶 자체가 시이고 철학인데 내가 무얼 한다고… 뭘 안다고….
기둥 하나를 만들려 평생을 빛 안 들어오는 광속에서
왼종일 파고 새기고 붙이는 이 나라 석공들
옆에 내가 하는 조각은 시늉에 불과하다.
백호짜리 비싼 캔버스를 말끔히 매어놓고
나는 그 안에서 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가?
다카 친구집을 떠나던 날 내 방 심부름해준 샤힌에게 물었다.
“너 힘들지. 떠나고 싶지 않니?”
그랬더니 샤힌 하는 말이
“아니, 마이 컨츄리 이즈 더 베스트 컨츄리 인 더 월드!”였다.
황당한 여건 속에서도 저들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불행하지 않았다. 옛날엔 저랬었지 우리도.
민심은 과연 인심일까?
우리에게도 민심이, 인심이 저리 좋았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비록 가진 것 없어도 선량하고 후한 저들의 마음씀씀이에 참 정말 감탄하며,
그리고 나 자신 부끄러워하며 고달픈 10일의 여정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번 생각을 정리해봤다….
이 여행에서 한 가지 내가 배운 건 정말 ‘아임’ 은 ‘낫씽’이라는 것,
그리고 신발이 없다하여 거지가 아니라는 것,
진짜 거지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어쩌면 거지는 신 신은 이가 더 거지일 거라는 것,
그리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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