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블루 민 혜
미몽에서 깨어난 순간 절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잠이 덜 깬 시야로 옷장이며 전기스탠드며 읽다가
침대 옆에 놔둔 책의 윤곽들이 어슴푸레 들어온다.
여긴 한데가 아니었구나!
그제야 나는 밤새 낯선 곳에서 떨고 있던 나를 안아주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오른 팔로 왼팔을 보듬고,
왼팔로 다시 오른 팔과 어깨를 만져주며
꿈속이 아님을 재확인시키기 위해 괜찮다고,
그건 꿈이었다고 소리까지 내었다.
스탠드를 켜니 새벽 2시쯤이다.
물을 마시려 몸을 일으킨다.
암회색 그림자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과장된 크기로 길게 일어선다.
나를 따라 움직이는, 그 혼백 같기도 하고 틈입자 같기도 한
그림자를 응시하며 나는 비로소 나를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던 명제는
적어도 이 몽유 같은 상황에선 빛을 발하지 못한다.
내 몸에서 한 겹 벗겨져 나간 듯한
그 시각적 형상만이 나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간밤엔 9시가 조금 넘어 잠에 든 것 같은데
지금껏 타지에서 애를 태웠다.
냉수 한 컵을 들이키고는 왜 이따금 이런
악몽 아닌 악몽을 되풀이해 꾸는가에 대해 유추해본다. 장소만
다를 뿐 벌어지는 상황이 늘 유사했던 것엔
그럴만한 사유가 있을지 모른다.
꿈속에서의 나는 어딘가를 가고 있던지,
어딘가에 도착해 있다.
글 쓰는 게 일상이 되다보니 때론 꿈에서도
메모지를 꺼내 풍광의 단상을 적어내리기도 한다.
날은 언제나 성급히 기운다.
낮의 밝음과 밤의 어둠이 서로 엉기며
하늘에 붉은 빛깔이 번지는가 싶더니
사위는 어느 새 미드나잇블루의 어둠에 완전히 함몰되고 만다.
그 색채는 자못 차갑고도 막막해서 나는 방위를 알 수가 없다.
그 어둠에 침몰될까 불안감이 밀물 닥치듯 몰려온다.
‘길치’에다가 밤눈 어둡고 밤거리를 두려워하는
내 모습이 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목적지에서의 일정을 다 마친 건지는 불확실 하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에
나는 기차역을 찾던지 버스 역을 찾던지 택시라도 부르려 한다.
웬일로 그게 좀체 여의치가 않다.
올 때는 분명 기차나 버스를 타고 왔건만
돌아갈 역을 찾지 못해 낯선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도움을 청하려고 주변을 둘러본다.
거리엔 사람들이 오고가나 나와는 관계없는 타인들 뿐.
그들은 끼리끼리 무슨 얘긴가를 하고 있던지
혹은 혼자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서울로 갈 수 있는 차편을 묻는다.
하나같이 모른다는 무심한 대답만 돌아온다.
누군가는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거기에 기차역은 없었다.
드디어 내 머리엔 쥐가 나기 시작하고
불안과 초조감은 극을 달리며 공황상태가 되고 만다.
낯선 거리엔 스산한 바람과 함께 녹슨 낙엽들이 지고 있고
사람은 보이나 나를 도울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질 않는 것이다.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빈들에 홀로 선 듯한
정신의 한기가 서릿발처럼 엉겨왔다.
남편 생전엔 없던 꿈이었으니
이건 홀로 남은 자의 무의식적 불안을 함의하는 거라고 봐야하나?
개체의 외로움과 고독은 원초적인 것이니
누가 곁에 있고 없고의 문제와는 별개일 터나
지금과 그때는 분명히 입장이 다르다고 봐야한다.
남편을 떠나보낸 후 심신이 어느 정도 정돈돼 갈 무렵
나는 점차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며 즐길 줄도 알게 되었다.
혼자서도 잘 놀던,
아니 혼자 일 때 더 잘 놀던 어릴 적부터의 기질 덕을 본 것이리라.
한 신학자는 고독은 혼자 있는 기쁨,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이라 정의했는데,
고독의 맛이란 쌉쓰레한 차를 마시고 난 뒤
미각에 감도는 은근한 감미와도 같아서
나는 날로 고독의 달인이 돼 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
수락산에 올랐다가 바위에서 굴러 낙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집까지는 어떻게 돌아왔으나
밤이 되자 통증으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고픈 배를 채우거나 전화를 걸려 해도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혼자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임이
구체적으로 절감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앞으로 사는 동안 이런 식의 곤경이
두 번 다시 닥치지 말란 법은 없는 거라며 내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한 밤중에 갑자기 심장이 멎을 것 같은데
자식과 연락이 닿질 않아 고독사를 할 지경에 놓인다던지 하는 식의
극한적 상황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두며 나는 제법 다져졌다.
문제는 몸이 아파 약국에 간다든지 병원엘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철갑으로 무장됐던 용사가 한 순간 비루먹은 병사로 변한다는 거다.
혼자 있는 기쁨을 즐기던 여유가 해체되며 파생하는 무력감을 보면
저간의 모든 게 착각이지 싶어 이런 나를 보기가 민망했다.
그 와중에 내 가슴에 타격을 가한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꿈을 꾸고 난 이튿날, 은행에 들렀다가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근래 그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친구는 내가 말한 사연을 놓고 비판적 일침을 놓았다.
상대의 표층만을 읽어내고 자신의 뜻을 단호히 밝혀온 듯한 그의 말이
내 귀엔 카나리아가 참새에게 다가와 자기처럼 소리를 내보라하는
요구만큼이나 막막하게 들려왔다.
우리는 서로 궤도를 달리하는 별들.
전화는 짧게 끝났다.
그의 나직한 한 마디가 벌침처럼 통렬했다.
살아오는 동안 측근들 사이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들 사이에서 불통으로 서로를 외롭게 했던 일들과
날 선 풀에 베이듯 상처를 주고받은 기억이 뇌리에서 꿈틀거렸다.
인간 사이에 완전하고도 지속적인 이해를 바란다는 건
나눌 수 없는 고독을 나눠보려는 것과도 같은 난센스일 터.
마음을 다 털어내면 후련한 듯 하면서도
또다시 심적으로 가난해진다.
그러면서도 속내를 드러낼수록 상대와 가까워졌다고 느껴지는 게
인간 심리이고 본다면 마음의 운용이란 이렇듯 양면적 딜레마를 안고 있다.
나는 번호표를 빼 들고서 축축해진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찍어대었다.
마감시간이 가까워 선가 이런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순번을 기다리는 고객들은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거나
티브이에 멍한 눈을 고정하거나 데리고 온 아이들과 뭔가를 하고 있었다.
거리엔 차들이 쌍방으로 쌩쌩 달렸다.
한 순간, 그 모든 형체도, 뒤범벅된 소음도 나와는 무관한 듯 우련하게 멀어졌다.
꿈속에서 본 미드나잇블루의 서늘하면서도 스산한 무언가가
다시금 내 주위를 에워싸는 것 같은 기시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꿈에서처럼 당혹해 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어둡게 짙푸른 그 구심을 향해 더 깊이 침잠해야 할 것 같았다.
고독이라는 이름의 전차 - 민혜의 < 미드나잇 블루 > 윤성근
‘고독’은 우리가 일상 중에 경험하는 흔한 감정이지만 그 개념은 그리 단순치 않다.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사전을 뒤져본다.
외롭고 쓸쓸함, 부모 없는 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 정도로 풀이하고 있다. 성이 차지 않는다.
반대말을 알면 이해에 도움이 될 터인데
얼른 떠오르지 않아 인터넷을 뒤진다.
‘유대’라 주장하는 사람도, ‘신뢰’가 맞는다는 이도 있다.
하지만 두 단어 모두
반대말로는 흡족해 보이지 않는다.
민혜의 ⌜미드나잇 블루⌟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몸 풀기였는데, 얻은 게 없다.
어쩌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선입견 없이 보고 느끼라는 뜻인가 싶어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
⌜미드나잇 블루⌟는 작가 민혜가 풀어내는 ‘고독’ 해설서로 보아 좋을 것이다.
다양한 감성의 전개에 숨겨놓은 논리는 학술논문
못지않게 명료하고,
드라이하게 느껴지기도 할 메시지는 조금 무거운 분위기를 앞세워 걸림돌을 용케 비껴간다.
계산된 시도 일
것이다.
고독감도 원인이나 전해지는 방식에 따라 그 모습도,
감내하는 방식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미드나잇 블루⌟는 유형이 다른 3종류의 ‘고독’을 예시하며 그 각각의 의미를 조명한다.
작품을 따라가며 ‘고독’을 느껴 보자.
정신적 고독 ;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악몽은 정신적 고독의 징표로 보아 좋을 것이다.
꿈이란 정신 활동의 연장선상에서나 가능할 것이지만,
꿈에서 벗어난 후에도 “과장된 크기로”로 보이는 “암회색 그림자” 가
“시각적 형상”으로만 확인되고 있음은 정신적으로 느끼는
외로움을 상징한다.
이는 스스로 느끼는 정신적 불안감이 원인이니,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기도 가능하다.
화자는 남편과의 사별 후
“홀로 남은자의 무의식적 불안을 함의하는” 것으로 여기다가도
현실을 수용하며 ”고독의 달인이 되어가는 것“ 같이 느끼는 장면에
독자는 마음이 놓인다.
정신적 고독을 정신력으로 치유하고 있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물리적 고독 ; 화자는 불의의 사고로 활동이 불가능해져,
사람들과의 연결 고리가 끊긴 상태에서 물리적 고독을 체험한다.
이
경우는 자의로는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고독사”의 “극한적 상황까지”도 의식한다.
때문에 “혼자 있는 기쁨을 즐기던
여유가 해체” 되어 “무력감“을 느끼면서
“저간의 모든 게 착각”이었음을 알아차린다.
물리적 고독은 정신적 고독보다 더 감내하기 힘든 경우로 치부하고 있음일 것이다.
관계의 고독 ; 믿는 이와의 관계단절 때문에 감수해야하는 고독이 최악의 경우임을 예시한다.
관계유지란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관계단절이라는 물리적 고독감에 더하여 스스로 떠안아야하는 정신적 고독감까지 수용해야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가 누구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은 선택받은 일일 터이지만,
주었던 마음을 되돌리기란 선택의 행운도,
이를 위해 쌓아온 정성도
일시에 포기해야 하기에 상처도 클 것이다.
이런 때는 일찍 체념하는 것이 상책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 사이에 완전하고 지속적인 이해를 바란다는 건”, “난센스” 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의 외로움을 겪으며 산다.
이는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기에,
받아들이고 관리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고
작품은 넌지시 귀띔한다.
마음이 아파도, 즐거워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엔 차들이 쌍방으로 쌩쌩 달렸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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