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좋은 글들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펌)

wild rose* 2019. 12. 10. 00:25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방송되어 우리나라를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편지를 낭독하는 진행자는 물론 그외 방송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물로 인하여

잠시동안 방송중단 사태까지 있었던...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아버지가 남기신 빚을 갚기 위해

 

서울로 떠나신 후,

 

다섯 살이던 저와 세 살이던 남동생은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 손에 맡겨 졌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겠지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시절은

 

할머니 손에 맡겨지고 1년이 지난

 

여섯 살의 봄입니다.

 

 

 

불행히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어린시절은

 

지금까지도 제 가슴속에 아픈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날...

 

도시생활을 하고 있던 친척들이

 

저와 제 동생 문제로

 

할머니 댁을 찾았습니다.

 

 

 

너무 어렸기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할머니와 친척들간에 언성을 높이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안 된다는 말씀만 반복하셨고,

 

친척들은 사는게 힘들어서 도와줄 수

 

없다는 말만 거듭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저와 제 동생에게

 

새 옷을 입혀주고,

 

새 신을 신겨주며,

 

좋은 곳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울먹이시던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 아버지는 저희 남매 손을 이끌고

 

문밖을 나섰습니다.

 

 

 

친척들 누구하나

 

따라나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다르셨습니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저희 남매를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안 된다.

 

절대 못 보낸다.

 

고아원에도, 아들없는 집에도,

 

나는 못 보낸다.

 

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들 못 보낸다.

 

니들 헌티 10원 한푼 도와달라구

 

안 헐라니까 보내지 마라.

 

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할머니의 눈물이

 

지금의 저희 남매를 있게 해준 것입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들 없는 집에 보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친척들께 약속하신대로

 

10원 한 푼 받지 않고 저희 남매를 기르셨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시며 받아오신 품삯으로

 

생활을 꾸려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저희 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셔야 했는지,

 

스스로 얼마나 억척스러워 지셔야 했는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그저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새 옷 한 벌없이 남의 옷만 얻어 입는 것이

 

불만이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학용품을 넉넉하게

 

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마음 놓고 과자 한번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소풍에 돈 한푼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불만이 었고,

 

운동회 때 할머니랑 함께 달리는 것이 불만이었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불쌍한 아이 취급받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 옷 한벌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러 다니며

 

할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넉넉하게 학용품을 사 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소풍간다고 김밥 한번 싸주지 못하고

 

용돈 한 푼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른 아이들은 운동회 때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나이 드신 당신 몸으로 해 주시느라 얼마나 진땀을 빼셨을지,

 

어디서나 애비 에미 없다고 손가락 질 받는 손자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 을 쓸어 내리셨을지,

 

그때는 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 하나 더 얻으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저희 남매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당신의 체면이나 얼굴을 모두 버리시고,

 

오로지 저희 남매를 위해 사셨습니다.

 

 

 

앉았다 하면

 

신세 한탄이 먼저 나오고,

 

불쌍한 손자들 얘기를 풀어 놓으며

 

눈물을 훔치시기 바빴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었고,

 

새 연필 한 자루라도

 

얻어 쓸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철없는 남매를 기르시면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강하셨지만,

 

또 누구보다 여리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가시는 날에는

 

새참으로 나온 빵을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시는 분이셨고,

 

1주일에 한번

 

장으로 나물을 팔러 가시는 날에는

 

순대를 한 봉지씩 사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동생과 제가 싸우면

 

뒤란에 있던 탱자나무 가지로 심하게 종아리를 치셨지만,

 

붉은 줄이 그어진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금세 눈물을 훔치시는 분이셨고,

 

맛있는 과자를 마음껏 못 사줘

 

미안하다며 문주를 부쳐주시고,

 

개떡을 쪄주시고,

 

가마솥 누룽지에 설탕을 발라주시는 분이셨고,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우산 대신 고추밭 씌우는 비닐로

 

온 몸을 둘러주시고 빨래집게로

 

여기저기 집어주시며,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놀리거든,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돌돌 싸매면

 

비가 한 방울도 못 들어와서

 

옷이 안 젖는다더라. 너도 니네 엄마한테

 

나처럼 해달라고 해봐.”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시던 분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봄이면 나물을 뜯어 다 장에 내다 팔고,

 

여름이면 고기를 잡아다 어죽집에 팔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따다 묵집에 팔고,

 

겨울에는 손에 마늘 독이 베이도록

 

마늘을 까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시간들이

 

스물 아홉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행복이라는 걸 몰라서

 

할머니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지요.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억척스러운 할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반항적이었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제 마음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할머니가 미워서 버릇 없이 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고생하시는 할머니가 불쌍하거나

 

안쓰럽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을 훔쳐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할머니가 제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춘기의 저를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우리 남매가 아니었다면

 

혼자 편하게 사셨을 할머니가

 

손자들을 떠맡은 죄로 불쌍하게 사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철이 들 무렵에야 알았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각각 천안에 있는 상고와 예산에 있는 인문고등학교에 진학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 남매는

 

주말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안에 빵과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셨던 할머니가

 

새참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셔서

 

냉장고에 넣어놓으신 거였습니다.

 

 

 

남들 다 새참 먹을 때 같이 드시지

 

왜 이걸 냉장고에 넣어 놓으셨냐고,

 

유통기한 다 지나서 먹지도 못하는데

 

왜 그러셨냐고 화를 내면,

 

 

 

“니덜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야 말이지.

 

니덜 오먼 줄라고 냉장고에다

 

느 놨는디, 날짜 지나서 못 먹으먼 워쩐다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도 할머니를 가엾다고,

 

안쓰럽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제가

 

냉장고에 가득하던

 

빵과 우유를 내다 버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때가

 

제가 철이 들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자취하는 제게

 

김치와 쌀을 갖다 주시겠다고 올라오신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터미널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 찾아낸

 

할머니는 반갑게 제 손을 잡으시며

 

 

 

“아침 7시 차 타구 나왔더만,

 

10시두 안돼 도착허더라.

 

한 3시간은 이러구 서 있은 모양이여.

 

기다리다 배고파서

 

나 먼저 짜장면 한그릇 먹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다시 가슴 한 구석이 아렸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께 화를 냈습니다.

 

 

 

“그러게 내가 아침 드시고 천천히 출발하시라고 안 했어!

 

할머니 때문에 속상해 죽겄네.”

 

 

 

할머니는 화가 난 손녀딸의 눈치를 살피시며 들고 오신 가방 지퍼를 여셨습니다.

 

 

 

할머니가 들고 오신 큰 가방 속에는

 

김치통 두 개가 들어 있었고,

 

가방안은 김치통에서 흘러나온

 

빨간 김치국물로 한가득이었습니다.

 

 

 

“내가 할머니 때문에 미치겠네.

 

김치만 비닐봉지에 꼭 싸서 가져오셔야지,

 

가방에다 김치통을 통째로 넣어오면

 

국물이 안 넘친데?”

 

 

 

할머니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이를 워쩌까.

 

국물이 다 새서 못 들고 가겄다.

 

내가 언능 수퍼가서 봉다리

 

얻어 올팅께 지달려라?”

 

 

 

할머니는 터미널 안 슈퍼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얻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김치통을 봉지 안에 넣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네덜이 지덜언 짐치 안 먹구 사나,

 

노인네가 버스안에서 김치 냄새 좀 풍겼기로서니,

 

그렇기 코를 막구 무안을 줘”

 

 

 

할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차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며

 

안절부절 하셨을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할머니는

 

김치 전해줬으니 그만 가 봐야겠다시며

 

들고 오신 가방 안쪽 작은 지퍼를 열고

 

꼬깃 꼬깃 접은 1만 원 짜리 두 장을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건네주신 1만원짜리는

 

빨갛게 물들어서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던 저는

 

얼른 매표소로 뛰어가 할머니 차표를

 

끊어다 드리고 할머니를 배웅해

 

드렸습니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시내버스안에서

 

얼마나 소리내어 울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가 젖은 가방에서 꺼내 주셨던,

 

빨간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던

 

1만원짜리 두 장을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직한 저는 돈을 벌게 되었고, 이제 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면

 

약재시장에 가서 좋다는 약재를

 

사다 보내 드리고,

 

할머니 생신이 다가오면

 

동네 할머니들과 식사라도 하시라고

 

용돈도 보내 드리고,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와 장으로 구경도 나가고,

 

명절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도 사드렸습니다.

 

 

 

처음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먹던 날,

 

할머니는 돈가스 한 접시에 음료로 나온 사이다 한잔까지 쭉 비우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양두 얼마 안 되는 것이 참말로 맛나다?

 

이런 것이먼 몇 접시라두 먹겄다.”

 

 

 

저는 할머니의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까짓 돈가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제서야 사드리게 됐을까.

 

 

 

가슴이 아파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제가 먹던 접시를 할머니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그날 하얗게 서리 내린 할머니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맛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 드리리라.

 

 

 

남들 먹는 거,

 

맛있다고 하는 거,

 

한번씩은 다 맛보여 드리리라.

 

 

 

좋은 옷도 입혀 드리고

 

멋진 구경도 맘껏 시켜 드리리라.

 

 

 

언젠가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손녀딸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고,

 

이쁜 새끼 낳아 사는 거 보고 죽으먼

 

내가 소원이 없을 것인디.”

 

 

 

저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다음 달이면 돌을 맞는 예쁜 딸아이도 낳았습니다.

 

 

 

할머니는 올해로 팔순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우리 남매를

 

길러 내셨던 할머니는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허리도 구부러지셨고,

 

검은 머리가 한가닥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너무 늙으셔서

 

예전처럼 맛있는 문주를 부쳐 주시지도 못하고,

 

개떡을 쪄 주지도 못하고,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주시지도 못합니다.

 

 

 

뜨거운 밥에 올려 먹던 할머니의 얼짠지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이제는 그때 그 맛을 내시지도 못합니다.

 

 

 

같이 봄나물을 뜯으러 다닐 수도,

 

도토리를 따러 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하면,

 

낡고 닳아 헤진

 

고무신 한 짝이 떠오릅니다.

 

 

 

헌 고무신처럼

 

평생을 마음껏 가지지 못하고

 

지지리 고생만 하시며 살아오신 할머니,

 

이제 할머니가 제 곁에 함께하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

 

제가 할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꽃으로 태어났으나

 

들풀로 사셔야 했던 그분의 인생,

 

이제부터라도 화사한 꽃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신 할머니!

 

 

 

이제 저는 할머니의 사랑과 고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우리 할머니 손을 잡고 꽃길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오래 전 눈물나게 아름다웠던

 

유년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웃어 보고 싶습니다.

 

 

 

-펌 글-

 

 

  • Sabrina 2019.12.10 06:58 신고

    늘 기도해 주셨던 외할머니가 생각이 나네요.

    답글
    • wild rose 2019.12.12 04:36

      아 저도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들 중에 유일하게 외할머님의 사랑만 받았습니다.
      다른 분들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생존하셨던 분들이라
      그저 부모님의 말씀으로만 상상을 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이들이 저 이야기 속의 할머니처럼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서 자기 자식들을 사랑으로 지켜 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되어봅니다.
      그러면 그 자식들은 어른들에게 받은 사랑을 바탕으로 또 다른 내리사랑을 줄 수가 있을 테니까는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미디어의 발달로 우리는 알 수가 있는데 나의 일이 아니라도 참 안타깝더라고요. ㅠㅠ...

  • William 2019.12.20 07:19 신고

    저는 할아버지 한번 본 기억이 있고 할머니는 일찍 가셨죠.
    오직 자주 본 외할머니는 진해, 서울, 미국에서였죠.
    외할머니는 창원과 마산 중간에 위치한 3번째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여자는 시집가면 남이 된다는 봉건사상에
    아들은 신학대학교도 보냈지만 딸들은 서당 문턱도
    못가고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집안일만 시켰죠.
    처녀시절때 3년간 일본에 가서 돈벌어 왔을때는
    집에서나 친척들에게 다 가지고 갔었죠.
    평양에서 온 목사하고 결혼 했지만 작은 교회를 목회
    하셔서 혼자서 겨우 생활만 할수 밖에 없어서
    외할머니가 일본어를 괜찮게 해서 일산집을 얻어서
    텃밭을 가꾸고 평양시내에서 장사를 해서 가족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가난이 힘들어서 2남2녀중
    어린 어머니와 작은 외삼촌을 잘 아는 부자에게 입양을
    시킬려고 했으나 외할머니는 끝까지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말씀 하시며 반대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엔 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일본순사에게 항상 쪽기다가 감방생활도 하셨고 해방후에는
    북한 공상당에게 쪽기다가 1949년 혼자서 월남하셔서 행방불명이 되었죠.
    아시다시피 일사후퇴로 외할머니는 혼자서 2남2녀를 거느리고
    피난길에 막내인 작은외삼촌을 잃어서 24년후에 찾을때까지
    진해에서 장사를 하면서 가난은 계속 되었습니다.. [비밀댓글]

    답글
    • wild rose 2019.12.20 18:08

      윌 님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우연히 님이 블로그에 올려놓은 가족 이야기를 감동으로 읽어서 일 것입니다.
      한국전쟁시 아드님을 잃어버리고 그 아들이 성인이 되어서 다시 만난 스토리는 정말 귀한 스토리라서
      당시 나도 모르게 윌 님의 블로그 글에 댓글을 달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윌 님이 글도 잘 쓰시고 또 아주 솔직하게 쓰셔서 더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덜 할머니가 태어나실 때 대한민국의 역사가 참 기구하였지요.
      더구나 남녀를 차별하던 시절인 그 시대에 태어난 할머니 어머니 세대분들은
      고생을 참 많이 하신 가여운 분들이 시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역경을 이겨내신 참으로 강한 여성분들이 시기도 하지요.

      윌 님과 벌써 블친이 된 지 2년이 되었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님의 블로그에 써 놓은 글을 다 읽고 나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쩌든지 건강 잘 지키시고 가끔씩 블로그에 소식 올려 주시면
      윌 님께 안부를 글로라도 전하겠습니다.

      [비밀댓글]

    • William 2019.12.23 23:25 신고

      올려주신 "나를 철들게한 할머니"의 글을 눈물을 삼키면서 읽었습니다.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 세대가 춥고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을 끝없고 위대한 헌신으로 좋은 가정을 만들어서
      한국을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해외에서는 사회에 성공할수 있는 자녀들을 창출했다고 봅니다.

      여사님과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된것을 영광입니다.
      제 블로그를 주말에 보니 벌써 3년쯤 됐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포스팅을 칭찬과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지나온 과거를 정리하는데 아직도 3번이나 간 고국방문기를
      쓰고 있지만 반도 못했고 너무 치우쳐서 부족한 글이지만
      다시 많이 잊어져가는 고등, 대학교 시절을 마무리 할까 생각합니다.

      즐거운 성탕절과 행복이 넘치는 새해가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비밀댓글]

    • wild rose 2019.12.25 12:36

      그러게요. 가만 생각해 보면 현재의 대한민국과 당시의 대한민국 천지차이였지요.

      언젠가도 윌 님이 말씀하셨듯이 전 박정희 대통령께서 하신 정치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이가 별로 없잖아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그분의 지도력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그분의 능력이 더 높이 평가되리라 믿습니다.
      물론 우덜 할머니 어머니 세대의 희생과 노력이 함께 그 기적을 만드는데 당연히 큰 몫을 차지했을 겁니다.

      글을 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중학시절을 보내시다 미국에 오신 윌 님이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더 쉬은 일이 아닐 텐데
      블로그를 통해서 윌 님의 한국어 실력도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글이라는 게 취미가 있어야 되고 또 능력도 있어야 되는데
      윌 님의 글 들은 읽기 쉬우면서도 항상 읽는 재미도 함께 주시기 때문에 더 인기가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주욱 블로그 활동을 하시면서 글솜씨를 늘려가시기 바랍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셔도 블친들은 윌 님을 잊지 않고
      님의 블로그를 찾으리라 믿습니다.

      윌 님께서도 즐거운 성탄과 연말연시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내년 초 해가 뜨기도 전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행 계획이 있습니다.
      1월 16일에 미국에 돌아올 예정입니다.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비밀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