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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의 작가 박계형 (펌)

wild rose* 2020. 3. 28. 15:45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의 작가 박계형

 
 

 

사춘기 시절..

박계형의 소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을 읽었는데

그 여운이 정말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로도 책을 구해 다시 읽고 싶었고

작가의 근황도 궁금했는데

우연히 박계형 선생님의 근황이 소개된 기사가 있어

여기에 옮긴다.

 60, 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박계형의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대단하리라 생각한다.

 

“진정 머무르고 싶은 순간은 빈자와 함께 할 때입니다”

 

뒤로 물러앉은 산도, 앞으로 촘촘히 들어선 마을도 단잠에 빠진 이른 새벽. 바스락거리는 움직임이 어둠을 가르고 작은 발자국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깬다. 느릿느릿 계속 이어지는 소리…. 발소리가 멈추는 곳은 서울 상도동의 한 주택가 골목이다. 새벽부터 해뜰녘까지 몇 시간에 걸쳐 이곳에 하나 둘 모여든 이들. 100명은 족히 넘는 숫자다. 비좁은 골목길은 그만 완전히 ‘점령’당하고 만다.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사람들. 꾀죄죄한 모습에 피곤까지 더한 듯 보이면서도 얼굴마다 가벼운 흥분으로 홍조를 띠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노숙자들에겐 박숙자씨로 알려져

새벽부터 상도동 골목으로 몰려든 일단의 무리는 거리의 노숙자와 행려병자들. 이곳에 사는 박숙자씨(59)가 매월 첫째주 수요일에 걸인들을 위해 먹거리와 돈을 나누어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든 것이다. 이들은 박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유행이 한참 지난 낡은 옷을 입고 박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초라한 행색이지만 굵은 눈매에서 감히 범접키 힘든 무게를 느끼게 하는 여인이다. 어김없이 달걀·컵라면·과일 같은 먹거리와 돈 2,000원은 준비돼 있다. 그저 공짜로 하루 끼니를 해결하려고 찾아든 이들. 그러나 박씨는 “당신은 성지(聖地)를 찾은 ‘순례자’나 다름없다”며 이들을 위한 진심어린 기도를 덤으로 얹어준다.

노숙자들의 ‘상도동 순례’가 시작된 지 벌써 10년째. 걸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박씨의 인심이 입소문을 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박씨가 “아예 한달에 한번 날을 정해 대접 하겠다”고 약속을 하면서부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약속을 지켜온 박씨. 이제는 자활에 성공해 오히려 선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친구가 되어버린 인연도 있다. 그러나 ‘순례자’ 중 이 여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걸인들 사이에 ‘대모(代母)’로 불릴 뿐이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의 작가 박계형

1960년대에 사춘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박계형’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박숙자씨의 필명. 1964년 고려대 영문과 재학시절 동양방송 개국 기념 현상 문예에 장편소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 당선,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소녀적 취향의 서정적인 대중소설로 40만부 판매를 기록하는 등 당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다. 서점에서는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속에’ 등과 함께 베스트셀러 목록에 나란히 진열돼 있었다. 그 후 박씨는 70년대 후반까지 60여편에 달하는 장편소설과 드라마 대본을 써 냈고, 특히 여고생·여대생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부와 명예를 한 순간에 거머쥔 당대의 ‘스타’. 그러나 그녀는 77년 ‘달무리’ 를 쓴 후 5년간 공백기를 갖고 82년 ‘사랑의 샘’을 마지막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과연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방황과 구원

책에 대한 계약금으로 기와집 한 채 값을 받기도 했을 정도로 성공한 작가이니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훌륭한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고, 값비싼 자가용을 몰고 다녔으며, 살림하는 사람을 셋이나 둘 정도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할 것 하나 없는 그야말로 ‘화려한 시절’. 그러나 정작 마음 한 쪽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낮 동안에는 수차례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불덩이에 시달렸고, 잠자리에 누워서는 가혹하게 뇌리에 엄습해 오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박씨는 정신적으로 시들고 있었다. 가지면 가질수록 커지기만 하는 공허감. 소설에 대한 회의도 함께 찾아왔다.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에게 삶을 지탱할 희망이 우연히 찾아왔다. 보수주의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가 정신적 방황으로 피폐해질 무렵인 80년 사순절 새벽, 신을 만난 것과 같은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면서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나서 방황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소유하고 집착하는 생활방식, 작가적 양심에서 벗어난 글을 세상에 내놓으며 저지른 죄악들이 고통으로 다가왔던 겁니다”

세속적인 명예나 부를 소유하고자 하는 가치관을 통해 써낸 작품들에 대한 회의가 깊었다. 본격적인 은둔은 물론, 자신이 썼던 작품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생활방식도 모두 바꿨다. 자가용도, 좋은 옷도 버렸다. 버리고 나니 오히려 날개를 단 듯 했다.

 

◇은둔을 접고 소명의 삶으로

버리고 또 버렸으나 아직 가슴에 욕심이 남았던 탓일까. 하늘은 장남을 데려갔다. 기관지에 이상이 있던 아들은 93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고, 어미의 마음에는 못이 박혔다.

박씨의 마음처럼 흙바람이 몰아치던 어느날, 집에 한 걸인이 찾아들었다. 어릴 적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큰 아들. 그의 영혼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뒤로 박씨는 완전히 자신을 버렸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 집을 성당에 기부해 성당으로 꾸미고 나이들어 갈 곳 없는 사람들, 장애 때문에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았다. 많은 노숙자들을 한꺼번에 돌볼 형편이 안돼 한 달에 한번 그들을 위한 행사를 했던 것이 10년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은 시간을 잊게 했다. 땅을 딛고 살아가는 곳에서 천상의 기쁨을 맛보았다. 많이 버릴수록 많은 것이 채워졌다.

허울을 벗고 낮은 곳에서 살아왔던 지난 20여년. 박씨는 이제 은둔을 접었다. 이제는 진실을 담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삶의 진실이 반영된 글을 쓰고, 그 문학적 진실이 가슴을 치면 살아있는 문학이 될 수 있다”고 그녀는 믿는다. 지난해 사랑과 죄와 죽음의 문제를 조명한 ‘임종’을 내놓았고, 곧 영혼의 본질에 관한 천착을 담은 ‘회귀’를 내놓을 예정이다.

박씨에게 삶은 소명(召命)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 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난 진실이 담긴 글을 세상에 내놓을 것. 소명을 가슴깊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도 느낀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서서, 외지고 어두운 곳에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그녀가 젊은 시절부터 그토록 찾아 헤매던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경향신문 /김정선기자

 

Sabrina 2020.03.29 09:07 신고

전혜린씨 책도 이어령씨 책도 읽었는데, 이 분은 처음 듣는 분이네요.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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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ld rose 2020.03.29 13:13

      아 네~
      박계형 씨는 그 당시로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에로틱한 소설을 쓰신 분입니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많이 있었고
      중고교 시절 읽기도 많이 읽었는데 특별하게 생각나는 것은 없고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인 성재라는 이름이 생각이 나고
      아주 재밌게 읽혔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그녀의 문장력이 좀 특별하지 않았나 하는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그녀가 쓴 스토리는 주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쓴 스토리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