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좋은 글들

정성화 님의 수필 9편(펌)

wild rose* 2018. 12. 3. 14:49

 

 

 

각도
 

 

   각도기의 중심에서 보면 1도라는 각은 아주 작다. 그러나 작은 각일지라도 각도기의 바깥쪽을 향해 계속 뻗어나가게 한다면, 각이 벌려놓는 거리는 점점 커지게 된다. 삶의 각도도 그렇다. 1도만 바뀌어도 십년 이십년이 흐른 후에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서 삶의 패러다임도 바뀌게 된다. 돌아보니 내 삶은 그다지  편안한 각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1981년에 일어난 그 일은 내 삶을 날카로운 예각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두뇌가 명석했으며 내 또래치곤 세상사에 대한 요령을 빨리 깨친 편이었다. 내가 시골에 있는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집에 자주 내려가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가끔 우리 집에 과일 봉지를 안고 들러주곤 했다. 그녀의 한결같은 우정이 고마워서 나는 그녀와 영원히 친자매처럼 지내리라 다짐했었다.

 

 

 사건은 언제나 느닷없이 터진다. 어느 날, 그녀가 내 어머니를 찾아와  어디서 오백만원을 구할 데가 없겠느냐고 통사정을 했다고 한다. 그녀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해 당장에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할 돈이 없다며, 보름 후에 적금을 타서 바로 갚겠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워낙 살갑게 굴던 그녀였기에 어머니는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내게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사채놀이를 하는 친척으로부터 돈을 빌려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주공아파트 열여덟 평 한 채 값이었다.

 

 

교직원 회의 중, 나를 찾는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시외버스를 타고 대구로 오는 동안,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부디 사실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그녀의 집에 들어서니 방이고 대청마루고 온통 빚쟁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온 가족이 야반도주를 한 상태라고 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두들겨 맞았는지 안방 장롱과 화장대는 이미 중태였고, 방바닥에는 가족사진 액자가 박살난 채 짓이겨져 있었다. 주인을 따라가지 못한 강아지 ‘해피’는 제 집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다. 방바닥을 치면서 우는 사람. 잡아서 유치장에 처넣을 거라며 악을 쓰는 사람, 얼이 빠져있는 사람 등, 그들과 따로 떨어져 아랫방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입술에 심한 경련이 일어났다.

 

 

사는 게 무서웠다. 사람이 무서웠다. 돈이 무서웠다. 딸의 친구라는 것을 믿고 빚보증을 섰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한 충격으로 인해 한동안 청력을 잃었다. 그녀의 사촌오빠, 그녀의 고향 친구, 그녀가 좋아한다는 옆집 오빠까지 찾아가 봤지만 그들은 모두 내가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불쾌해 했다. 세상이 우리 가족을 버리려고 단단히 작정한 것 같았다.

 

 

아침에는 ‘그래도 살아야한다’고 마음을 먹었다가, 밤이 되면 ‘그만 살고 싶다’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지곤 했다.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와 주는 ‘생각’,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아군 병사였다. 그녀를 붙잡아 그녀의 모가지를 단번에 비틀어버리는 상상을 하니 그나마 견딜힘이 생겼다. 분노는 내 몸의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그로부터 석 달 만에 우리는 살던 집을 처분해서 그 돈을 변제했다.

 

 

돈이란 그저 돈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혈액이었다. 몸속에서 이미 빠져나간 그 피로 인하여 우리 가족들은 오랫동안 지독한 빈혈에 시달려야 했다. 내 친구 하나로 인해 온 가족이 겪는 고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늘 돌에 짓눌린 두부 꼴이었다.  

 

 

그 후로 나는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고 경계심을 품는 성격으로 변했다. 내 삶에 던져진 그 화염병이 사람에 대한 신뢰를 다 불태워 버린 듯했다. 때로는 내 마음의 플러그를 아예 빼놓은 채 은둔형 외톨이처럼 지낸 적도 있다. 그 시절 내 혓바닥에 쌓인 그늘의 깊이를 누가 알까. 삶의 각도가 완전히 틀어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돈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상실이었다.

 

 

그로부터 이십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나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 하느님이 내 이름 밑에다 “못된 것”이라고 써놓는다 해도.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서울 어딘가에서 그녀가 여전히 지인들과 연락을 끊은 채 숨어 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왠지 울적했다.

 

 

기억을 들춘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것만이 아니다. 실은 현재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심리가 들어있다. 여고 동창회를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떼어놓고는 내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할 수 없었음으로. 지난날의 풍경을 맞춰내는 그림 퍼즐에 있어서 그녀는 내가 잃어버린  마지막 한 조각 퍼즐이므로. 

 

 

 내가 그녀를 용서했든 안 했든 그녀는 여전히 숨어산다. 헛된 욕망을 좇아 이리저리 헤엄치다 부레가 터져버린 물고기는 바다 속 밑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살고 있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 그녀가 빌려간 돈 오백만원은 그녀가 급히 수혈 받아야 할 혈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움이라는 암흑천지에서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냘프나마 연민의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일로 인해 그녀의 삶의 각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 각도는 고등학교 시절 그녀가 꿈꾸던 지점과 얼마나 큰 거리를 만들었을까.

 

 

 요즘 내 눈은 가까운 것보다 먼 것이 더 잘 보이는 원시다. 먼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마음을 잘 가다듬어보라는 몸의 말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눈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모양이다. 미래를 멀리 내다보면서 틀어져있는 내 마음의 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 같다.

 

 

각의 밑변을 이루는 것이 평상심이라면, 각의 다른 한 변을 이루는 것은 예기치 않은 일에 휘둘리는 마음이다. 결국 삶의 각도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인 셈이다. 나는 그동안 분노의 각 속에 그녀를 가둬놓고, 내 고된 삶에 대한 온갖 화풀이를 해 왔던 것은 아닐까. 그녀도 가끔은, 내가 겪을 고통을 상상하며 우울해 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어느 순간 생각의 이 쪽 끝과 저 쪽 끝에서 서로 우연히 만난 적도 많았을 것이다, 아주 지친 모습으로. 이젠 나도 그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걷어내고 싶다. 용서란 그리 거창한 게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을 상대방의 마음자리에 놓아보고 그 마음의 각을 읽어내는 게 아닌가 싶다.


 

그 때 우리 가족은 다 같이 손을 잡고 힘든 고개를 넘었다. 서로의 손을 놓지 않으니 발은 저절로 따라왔다. 내가 그 일을 겪으며 확실하게 배운 게 있다면, 집의 힘이란 모여 있는 신발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삶에는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도 있더라는 사실이다.

 

 

동창회를 마칠 무렵, 한 친구가 그 옛날 지겹도록 봄 소풍을 갔던 냉천 계곡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냇가 바위에 앉아 있으니 흘러가는 냇물이 뭐라고 자꾸 말을 걸어왔다. 냇물 속으로 가만히 두 발을 들이밀고 일어서려는데 내 발등위로 뭔가 휙 지나갔다. 노란빛을 띈 모래무지였다. 몹시 놀란 듯 모래무지는 얼른 모래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골목 모퉁이를 돌아 급히 몸을 숨기는 한 중년 여인의 뒷모습이 연상되었다. 한참동안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강바닥을 찾아서

 

 

 

 

 

빨래거리는 강으로 가기 위한 핑계였다. 강으로 가는 길은 탱자나무 울타리로 이어져 있었다. 하얀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어린 탱자가 가시를 피해가며 얼마나 자랐는지 보고 싶은 게 더 큰 이유였다.

 

 

빨래 방망이를 헹구어 다 해 놓은 빨래위에 얹고 내 고무신을 씻어 햇살이  드는 돌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는 동네아이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는 강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이들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발이 푹 꺼졌다.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내 발이 강바닥을 놓쳐버렸다. 아이들의 물장난치는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강바닥을 어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물 속에서 억지로 눈을 떴다. 강물 속은 엷은 연둣빛이었으나, 움푹 파여진 강바닥은 나를 향해 거무스름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얼른 손바닥으로 강바닥을 힘껏 떠밀었다. 그 반작용 때문인지 내 몸이 다시 떠올랐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큰물이 지나간 뒤에 엉켜버린 수초의 꼴을 하고 강가로 다시 걸어 나왔을 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햇살에 바짝 마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고무신을 보니 와락 눈물이 났다. 내 발가락도 얼마나 놀랐던지 하얗게 질린 채 쪼글쪼글해져 있었다.


 

열 살 때의 그 아찔했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수필 때문이었다. 수필이란, 소금물에 담가둔 바지락이 해감을 뱉어내듯 그렇게 저절로 내 몸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단단한 조개껍질을 들어올려 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닷물로 칼칼하게 씻어 갈무리해야 하는 조개의 속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수필을 쓰면서 갑자기 발아래가 푹 꺼지는 느낌, 물 속에 잠긴 채 어디론가 끝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수필집을 내는 일은 겁도 없이 강물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다. 강바닥에 언제 처박히고 말지, 물살에 의해 어느 강기슭으로 떠내려갈지 모를 일이었지만, 일단 나의 바닥을 내 발과 내 눈, 아니 나의 온몸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간간이 나를 엄습해 오던 수필에 대한 두려움을 그 강물에 얼마쯤 씻어보고도 싶었다.

 

 

물 속에서 눈을 뜨고 강바닥을 바라보았을 때 나에게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던 강바닥, 수필집을 낸다는 것은 그 강바닥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돼지고기 반근

 

 

 

 

 

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날 밤이었다. 어두운 얼굴로 나가신 아버지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발자국 소리가 우리 집 대문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소금이 물에 녹아내리듯 내 몸도 슬픔에 조금씩 녹아내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귀 두 개뿐인 듯 했다.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했던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눈이 먼저 보고 머리로 연락을 취한 그 순간, ‘아’ 하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게시판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누군가 뒤에서 밀며 머리를 좀 치우라고 했다. 시험에 떨어진 사람의 머리는 뒤에서 봐도 눈에 영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골목으로 접어든 바람은 모두 우리 집 대문을 흔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섣달 바람이 지루한 겨울밤을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이려니 하고 생각하자 다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대문에 걸어둔 우편함도 덜컹대고 있었다. 자랑스런 대학합격통지서를 담게 되리라는 제 예상이 빗나가서 제딴에도 꽤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이젠 낡아서 틈새가 벌어진 대문 두 짝이 계속 삐거덕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쇠로 된 문고리가 철판에 부딪히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내 속에서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바람에 채이고 멱살을 잡히면서도 대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맨 앞에 서서 고스란히 비바람을 맞고 있는 대문, 자신이 보듬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참고 있는 대문을 보면, 나는 늘 아버지가 연상되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는 두 가지였다. 술을 드시지 않았을 때는 군인 출신답게 무게가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아주 규칙적인데 비해, 술을 드시고 오는 날의 발자국 소리는 구두 밑창이 바닥에 조금 끌리면서 장단이 좀처럼 맞지 않는 엇박자였다.

 

 

간간이 발자국 소리가 끊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때 골목 중간쯤에 있는 전봇대나 담벼락을 붙잡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지도 모른다. 희망이라는 것들은 죄다 하늘로 올려가서 이제는 따오지도 못할 별이 되고 말았다는 아버지의 푸념소리가 골목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내 귀는 더 밝아졌다. 옆에서 잠든 동생들은 내 낙방소식을 잊었는지 편안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고, 안방에 계신 어머니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차라리 고마운 일이었다. 슬픔과 아픔에 절고 절어 내 몸이 오롯이 소금 한 줌으로 남는다 해도 나 혼자 감당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이 밤 어디에서 이 못난 딸의 아픔을 되새기고 계신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철커덕, 대문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내복 바람의 어머니도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마루로 나오셨다.

 

 

대문에 들어서는 아버지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아버지….”


 

“어이구, 이 가서나야.”


 

아버지도 목이 메는 듯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부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잠깐 있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잠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 꺼내려고 애를 쓰셨다.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손끝에 겨우 딸려 나온 것은 신문지에 둘둘 말린 무엇이었다. 마루 끝에 서 있던 어머니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돼지고기 반 근이다”


 

내게 그 뭉치를 건네주시며 아버지는 내 어깨를 한번 짚으셨다.

 

 

그 순간 속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 품속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돼지고기 반 근을 손에 들고 나는 그대로 마당에 서 있었다. 너거 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너거들 소고기도 못 사 먹인다는 혼잣말을 하며, 아버지는 어머니의 팔을 잡고서 힘겹게 마루를 오르셨다.

 

 

바람 부는 거리에서 식육점 문을 두드리는 아버지, 지갑을 펴 보며 ‘돼지고기 한   근’에서 ‘반 근’으로 다시 고쳐 말하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틀거리면서도 간간이 안주머니께를 더듬어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나는 마음 속 활시위를 한껏 당겨 아버지를 위한 별 하나를 쏘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낡은 구두를 비춰줄 별, 아버지가 올려다보면 어느새 어깨쯤까지 다정히 내려와 주는 별 하나를.


 

슬픔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걸까. 그것은 고작 반근의 무게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신문지가 엉겨 붙은  돼지고기 반 근과 맞바꿀 수 있었던 그 날의 슬픔을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사랑은 한 손으로 들 수 없는 무게였다. 참으로 온전한 한 근이었기 때문이다.

 

 

 

 

 

 

 

미얀마 선원(船員)

 

 

 

 

 

드라마를 보다가 가끔 황당해 질 때가 있다. 갑자기 쫓기는 신세가 되거나 실의(失意)에 빠진 극중 인물이 무슨 해결책이나 되는 것처럼 “몇 년 배나 타고 와야겠다”고 말하는 경우다.

 

 

평소에 바다를 동경해 온 것도 아니고 그동안 해운 물류 사업에 관심을 가져온 것도 아니면서 느닷없이 배를 타겠다니, 참으로 생뚱맞은 소리다. 배라는 곳은 죄를 짓고 잠시 도피하러 가는 곳이 아니다. 생의 의욕을 잃었을 때 쉬러 가는 곳도 아니다. 가족이란 이름의 안전띠를 매고 바다위로 매일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야말로 ‘삶의 현장’인 것이다.

 

 

어제 남편이 배에서 보내온 메일이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 생긴 너울 때문에 열여섯 시간의 드리프팅(drifting)을 한 뒤 막 항  해를 시작했을 무렵이었소. 다급한 연락이 왔소, 미얀마 출신의 조리수가 주방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연락이. 달려가 보니 그는 입가에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소. 배는 이미 육지로부터 멀리 와 있는 상황이었고.

 

 

위성전화로 의사를 연결해 응급조치를 물으니, 일단 링거를 한 병 투여한 뒤 빠른 시간 내에 병원으로 후송하라는 거였소. 스무 명의 선원 중 링거를 놓을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결국 선장인 내가 나섰소. 돋보기로 정맥을 들여다보며 링거 바늘을 꼽는데, 혹시 바늘이 혈관을 관통해 버릴까봐 손이 떨렸소. 주사 바늘을 몇 번씩이나 찔렀다 뺐다 하는데도 그는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소. 두 시간 전만해도 생글생글 웃으며 내 앞에 스테이크 접시를 놓아주던 그였는데.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손끝에 힘을 주어 바늘을 밀어 넣는 순간, 바늘이 쑥 들어가는 느낌이 전해져왔소. 그리고 수액이 삼분의 일쯤 들어갔을 무렵, 그가 고맙게도 눈을 뜨며 의식을 찾았다오.

 

 

배 안에 몰아친 태풍은 이제 무사히 지나간 것 같소.>


 

배에서 병이 나면 하늘이 의사이고 바다가 간호사다. 배란 원래 그런 곳이다.

 

 

미얀마는 1983년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이 있었던 나라 ‘버마’의 새로운 국명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어서 그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선원으로 해외 취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법대(法大) 졸업생이 우리나라에 오면 선실 바닥을 닦고 녹슨 선체에 페인트칠을 하며, 상대(商大) 졸업생들은 배의 밧줄을 정리하거나 주방에서 설거지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선내 휴게실에 모여 기타 반주에 맞추어 미얀마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다. 외로움을 이겨보려는 듯 목청을 한껏 돋우고 있었는데, 오글오글 모여 있는 그들의 작업화를 보는 순간, 나는 목이 메여왔다. 그 작업화들이 푸른 바다 위에 애써 내고 있는 길이 보이는 듯해서다. 그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넣고 돌아서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구겨진 종이가 제 몸을 펴느라고 ‘바지락 바지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종이 한 장도 원래의 모습, 원래의 제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몸을 가누는데, 가족을 다 두고 떠나온 선원들의 마음이야 오죽하랴. 그들은 푸른 바다를 보면서도 자신을 기다리는 ‘푸른 지붕’을  연상하고 있지 않을까.  

 

 

긴 승선을 마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선원들은 대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사 놓은 선물들을 선실 바닥에 죽 늘어놓고 내려다보면서, 풀어진 선물 포장 끈을 다시 묶거나 선물에 새로 포장을 하면서, 또는 가방에 선물꾸러미를 넣었다 꺼냈다 하면서,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다고 하다. 비(非) 정규직 남편에서 다시 정규직 남편으로 복권(復權)되는 날을 그들은 그렇게 맞이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나도 뭔가 해주고 싶었다. 그들이 떡을 좋아한다고 해서 배가 입항할 때마다 떡을 해 가져갔다. 배 위에서 당직을 서고 있다가도 내 모습이 보인다 싶으면 그들은 즉시 배 아래까지 달려와 내 짐을 받아 들었고, 나를 친누이처럼 반겼다. 어쩌면 나는 전생에 그들과 이웃 마을에 나란히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기억도 있다. 심근 경색증의 증세가 보인다는 의사의 판정 때문에 선원 생활을 그만 두고 돌아가야 했을 때, 말없이 굵은 눈물을 떨구던 어느 미얀마 선원. 추운 겨울날 갑판 위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미얀마 선원에게 다가가 기름때 묻은 그의 손에다 종이에 싼 팥빵 두 개를 쥐어주던 남편. 그들은 세상의 오지(奧地)에서 만나 서로를 젖은 눈으로 바라보며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보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여우같은 영악함으로 단련되어가고 있을 때 그들은 곰 같은 순박함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지는 모른다. 남편이 왠지 미얀마 선원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져간 떡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라든지, 승선 수당으로 받은 달러를 돌아앉아서 세고 또 세는 모습이라든지, 그리고 출항하는 배 위에서 나를 향해 양 손을 흔드는 모습까지도. 어느 한 사람의 모습이 때로는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현상되고 인화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등대가 되어 세상의 파도를 헤쳐 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닮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것이 어쩌면 그들이 함께 바다를 건너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망향가(望鄕歌)가 선내에 울려 퍼지던 그 날, 배는 한 마리 순한 고래가 되어 조용히 바다를 헤엄쳐갔다.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한번씩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버티고 (Vertigo)

 

 

 

 

 

아이 새도우를 바르는 손끝이 떨렸다. 눈썹을 너무 치켜 그리면 팔자가 드세보인다는 말이 생각나서 다시 눈썹 끝을 얌전히 주저앉혔다.


 

헤어 스타일은 또 어떻게 하나, 미용실에 가면 한 오 년쯤은 젊어 보이게 해 줄텐데. 망설여졌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부분에 신경이 쓰였다. 얼굴은 얼굴대로 굵은 허리는 허리대로 여기는 어떻게 할 거냐며 한꺼번에 내게 보채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이 모든 휘둥거림은 며칠 전 받은 전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 정성화씨 댁 맞습니까?”


 

“네, 그런데 누구세요?”


 

“저...... H입니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일제히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는 한동안 내가 눈부시게 바라보았던 사람이다. 나의 중학교 동창이면서 내가 강의를 들었던 어느 교수님의 동생이었던 그 사람. 그는 늘 유쾌했고 자신감에 넘쳤으며 세련된 매너에 유복한 가정환경까지 갖춘 부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많은 여학생이 그에게 다가서는 걸 보고, 나는 일찌감치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접어버렸었다. 담백한 말투와 태연한 행동으로 그를 견제하며, 친구라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다. 나에게 향한 그의 마음에도 얼마간 핑크빛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도 애써 모른 체 했다.

 

 

간간이 그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내 여고 후배와 결혼했다는 소식에 조금 서운했으나, 아들만 둘에 삼십대의 나이로 대기업의 이사가 되었다는 소식에는 오히려 무덤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십 사 년 만에 느닷없이 걸려온 그의 전화 앞에서 나는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대답 정도만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 편에 내 연락처와 근황을 알게 되었다며 부산에 가면 한번 만나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요, 친구니까 만날 수 있지요.”


 

라고 대답했다. 차 한잔 나누는 정도쯤은 그 누구라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얼른 달력의 약속 날짜에다 별표(★)를 해두었다. 안방에 들어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별이 잘 있는지 먼저 살펴보게 되었다. 그 별은 나의 마음에 어떤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그를 만난다는 설렘에 며칠이 가뿐하게 지나갔다. 

 

 

약속한 날 아침, 무사히 해가 뜨고 날이 밝아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도 연실 시계를 보았다. 옷을 차려입고 차를 몰아 해운대까지 가는 동안 줄곧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풋풋하던 그 얼굴에 중후한 멋을 곁들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니면 여전히 동안(童顔)의 모습일까 하며.  어느새 호텔 로비 앞이었다.


 

커피숍 창가 자리에서 한 남자가 일어서며 내게 손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옛날의 H가 아니었다. 갸름하던 얼굴은 둥글넓적해졌으며, 어느새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양복 상의의 앞단추는 곧 튕겨져 나올 듯이 보였다. 예전에 내 가슴을 태우던 그의 모습은 어디로 다 가버린 걸까.

 

 

하늘색 와이셔츠를 산뜻하게 받쳐입은 그의 상의가 왠지 눈에 익었다. 지난 겨울 남편과 내가 백화점 매장에서 몇 번이나 쥐었다 놓았다 했던 바로 그 옷이었다. 비둘기의 목덜미같이 윤기가 자르르한 벨벳 소재의 그 옷을 남편은 꽤 마음에 들어하며 서너 번이나 걸쳐보았었다. 그러나 남편은 계산대로 걸어가며 가격표를 확인해 보고는 그냥 말 없이 옷을 제자리에 걸어두고 나왔었다. 그 때 그 모습이 잠깐 내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외모는 변해 있었지만 듣기 좋은 바리톤 음성만은 여전했다.  그는 나에게 아마 여자 동창생 중에서 제일 나이가 안 들어 보일 거라며, 아직도 선생님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했다.


 

동창들 소식과 은사님에 대한 얘기를 했고, 직장 생활과 가족에 대한 얘기도 두루 나누었다. 이제 남은 얘기는 그와 나 둘 사이의 옛 얘기뿐인 듯 싶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가 뭉그적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얘기든 어서 해보라는 눈짓을 했다.


 

그는 이내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동창생 한 명이 위암으로 투병중이면서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서, 그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동창회에서 기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동창회장으로서 부탁하는 것이니, 내가 부산지역의 동창회를 맡아 연락을 좀 해달라는 거였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헛바람이 조금씩 빠지면서 내 속은 서서히 쭈그렁 망태기로 변해갔다. 

 

 

전투기 추락사고 중 상당 부분이 버티고(Vertigo : 비행착각)라는 착시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하는 바람에, 바다 위를 비행하면서도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여 거꾸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고중력 상태에서 수평 감각을 잃은 탓이다. 내게도 그런 버티고 현상이 일어난 셈이다. 기수를 급하게 돌려야 했다.

 

 

“그래요, 좋은 일하는데 도와야지요.” 

 

 

차르르 내려와 눈썹에 걸리는 앞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헤어 드라이값 육천원 생각에 속이 쓰렸다. 그가 내민 동창생 명단을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가방을 움켜쥔 손바닥에서 땀이 비질비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얼른 시계를 보며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했다. 집사람과 같이 왔다며 곧 커피숍에 내려올 테니 어디 가서 함께 점심식사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 한방에 완전히 비틀대는 복서(Boxer)의 모습이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고 싶어하는 엉덩이를 억지로 주저앉히며 나는 간신히 말했다.

 

 

“아니 됐어요. 부부끼리 오붓하게 드세요, 모처럼 부산에 왔을 텐데.”


 

부산은 어디 어디가 가볼 만하냐는 그의 말에 나는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 식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괜히 성질을 내고 있었다. 

 

 

나는 어서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 녀석의 아름다운 아내와 그 녀석의 행복에 겨운 모습을 보아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래 맞아, 사십대 여자는 까마귀도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했잖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무언가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스타카토의 발자국 소리를 내며 커피숍을 걸어 나왔다.


 

“새됐어”


 

누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사투리에 대하여

 

 

 

 

 

내 귀를 보고 있으면 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얼굴에 달려 있는 죄로 오십 년이 다 되도록 투박한 경상도 말만 듣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수를 한 뒤에는 귓바퀴 부분을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준다. 매일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날아와 탕탕 부딪히는데도 나의 귓바퀴는 여전히 그 형을 유지하고 있으니 참 용하기도 하다.

 

 

서울 나들이를 가면 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가 내 귀에 인절미처럼 착착 달라붙는다. 경상도 말은 빠르고 버럭 질러대는 고함 스타일에다 말 줄임이 심하여 되묻기가 일쑤인데 비해, 서울말은 상냥하고 경쾌해서 알아듣기가 쉬웠다.

 

 

기차를 타고 돌아올 때는 눈을 뜨지 않아도 기차가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대강 알 수 있다. 잠결에 들려오는 사투리 때문이다. 느리고 유순한 충청도 사투리가 조용히 오고 가면서 기차 안의 자리 바뀜이 소리 없이 이루어지면 아직 충청도 땅이다. 누군가 지나가면서 팔 다리를 건드리는 일이 잦아지고, 싸우는 듯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이제 기차가 경상도 땅으로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이쯤에서 나의 잠은 썰어놓은 김밥처럼 동강이 나게 마련이지만, 잠결에 듣는 그 우악스런 경상도 사투리가 나는 왠지 반갑기만 하다. 그래서 사투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진돗개처럼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동네구나, 우리집에 다 와 가는구나 생각하면서 우리 가족의 얼굴을 차례차례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향 사투리의 힘이 아닌가 싶다.


 

사투리는 그 지역 사람들의 기질뿐만 아니라 지형과도 많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게 무뚝뚝하고 투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기운을 받은 데다, 경북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내려온 유교적 언어 습관까지 합쳐진 탓이 아닌가 짐작된다.

 

 

또 먹거리에 따라 사람의 기질이 달라진다고 하니, 한결같이 맵고 짜게 먹는 경상도 음식 또한, 고집이 세고 다혈질적인 경상도 기질을 만드는데 한 몫 거들었을 게 분명하다. 말이란 삼키는 음식물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니만큼, 경상도 말은 어쩔 수 없이 ‘간이 센’ 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경상도 말은 좋고 싫고를 분명히 밝혀주는 ‘직거래 화법’을 쓴다. 그래서 때로는 무례하고 오만하며 전투적으로 들린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해 들어와 넥타이를 풀면서 하는 말이, 다음 날 오전 중으로 큰집에 돈 오백 만원을 송금해 주라는 것이었다. 오십 만원도 아니고 느닷없이 오백 만원이라니.

 

 

“와요?”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요새 행님 댁에 행편이 말이 아닌 갑더라”라고.


 

가타부타 아무 대답이 없는 내게 그가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떫나?”


 

이것이 경상도식 대화법이다. 알집(Alzip)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압축률을 보이고 있는.

 

사투리에는 가슴을 찡하게 하는 그 무엇이 들어있다. 그래서 고향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 코끝에 고향의 흙내음과 두엄 냄새가 스친다. 그리고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보이며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의 재잘거림도 들려온다. 우리가 사투리를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그 속에 고향 가는 길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들어 각 지역의 사투리가 문화의 새로운 코드(code)로 뜨고 있다. 표준어가 품질 보증 마크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진부하며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데 비해, 사투리는 다소 촌스러운 느낌은 있지만 우리말에 잠재되어 있는 역동성과 생동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표준어에 갇혀 있는 언어적 상상력의 한계를 한순간에 격파하는 자유분방함과 예측 불허의 표현 방식, 그것이 바로 사투리의 ‘개인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투리 속에는 우리들 마음에 난 상처를 달래주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 듯하다. 팍팍한 도시 생활에 지쳤을 때 고향 친구를 만나 진한 고향사투리로 한바탕 떠들어대고 나면, 이내 속이 후련해지면서 마음이 가라앉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사투리 속에는 말의 논리와는 관계없이 사리 판단을 감정적으로 몰아가려는 ‘독(毒)’성분도 들어있다. <토지>에 나오는 ‘임이네’의 거칠고 드센 경상도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 사사로운 원한과 치졸한 이해 관계를 어거지로 분장하는데 있어 이렇게 효과적인 언어가 또 있을까 싶다.


 

사투리 하면 소설가 ‘이문구’도 떠오른다. 약자들의 삶을 조롱하고 억압하는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수준 높은 해학과 풍자로 비판해온 작가다. 대거리와 어깃장의 수사학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그의 소설은 독자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소설 언어로서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를 선택하여 너무나 자유로이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소설 속 대화는 ‘먹물’의 언어가 아니라, 등장인물 자신의 질박한 삶 속에서 늘 쓰고 있던 말, 즉 체화(體化)된 언어였다. 그래서 땅속 깊이 묻어둔 김장독에서 푹 삭은 김치 한 포기를 꺼내 먹었을 때의 맛을 느끼게 한다. 사투리가 문학 속에서 이루어낸 또 하나의 쾌거(快擧)라 하겠다.

 

 

상대방이 공연히 거드름을 피우거나 야비하다 싶을 때, 경상도 사람들은 대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다 때리 치아라”(다 집어 치워라)고 소리친다. 또 상대방에게 분한 마음이 가득하나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궁시렁거리게 된다, “문디, 지랄하고 있네”라고. 이런 사투리들이 비속하고 상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정서를 가장 토속적이면서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해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사투리는 이 시대의 풍속도(風俗圖)를 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색채를 지닌 언어일 것같은 생각이 든다.


 

사투리란 그 지역 사람들의 숨결이 한데 어우러져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것, 어느 지역의 사투리인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각 지역 사투리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지닌 정감과 표현의 다양성을 잘 살려내기만 한다면, 우리의 언어 문화는 더욱 새롭게 번창할 듯 싶다.

 

 

경상도는 물건이 떨어지지 않고 ‘널찌는’ 곳, 학교에 다니는 학생보다 학교에 ‘댕기는’ 학생이 더 많은 곳이다. 또 경상도는 언제 어디서든 ‘쥑인다’ 한 마디면 그 의미가 두루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좋을 때도 ‘쥑인다’, 기분이 나쁠 때도 ‘쥑인다’, 감동이 밀려올 때도 ‘쥑인다’이니 그 의미가 무척 심오한 사투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박 삼일의 출장을 간 남편이 딱 한번 집에 전화해서는 “밥 무웃나… 별일 없제… 끊는다이…”하고 전화를 끊어버려도 아무 뒤탈이 없는 곳이다. 옛날부터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싸나이’들과 신의와 절개를 자랑으로 여기는 ‘아지매’들이 모여 사는 곳, 여기는 ‘갱상도’다.


 

 수더분하게 생긴 한 여자가 거울 앞에서 한 시간째 단장을 하고 있다. 사투리 한 마디면 모든 게 드러날텐데, 잔뜩 공을 들이고 있다.

 

 

 

 

 

 

 

서커스에 대한 추억

 

 

 

 

 

봄 햇살이 두터워질 즈음이면, 철길 건너편 공터 쪽에서 요란한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 서커스가 들어온 것이다.

 

 

미루나무보다 더 높은 나무 기둥들이 공터 주위에 빙 둘러 세워지고 나면 이내 알록달록한 대형 천막이 부풀어 올랐고, 그것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조금씩 부풀어갔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지름길을 놔두고도 일부러 그 앞을 지나 돌아오곤 했다.

 

 

그 무렵 우리는 먹을 것뿐만 아니라, 볼 거리와 놀 거리에서도 늘 허기를 느꼈다. 저녁에만 방송되는 TV를 보기 위해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 뒤 TV가 있는 집 대문을 기웃거리기 일쑤였으며, 장날마다 큰북 작은북을 앞뒤로 메고 심벌즈까지 매단 채 나타나는 약장수 아저씨를 꽤나 기다렸다. 약장수 아저씨와 함께 다니는 옷 입은 원숭이의 재롱을 보는 것도, 매혹적인 볼 거리의 공간이었던 만화방에 가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일 년에 한 차례 들어오는 서커스였다. 그래서 봄이 되면 공터 쪽을 더 자주 살펴보게 되었던 것이다.


 

서커스장을 짓는 일은 열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서커스장이 완성되기 전부터 그들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빠른 템포의 폴카 리듬과 신나는 트로트 메들리를 틀어대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서커스 공연이 시작되기 이틀 전부터는, 화려한 의상으로 갈아입은 모든 서커스단원이 트럭을 타고 천천히 동네를 몇 바퀴 돌았다. 삐에로 분장을 한 단원이 확성기에 대고, “서커스가 왔습니다. 전국 방방곳곳을 돌고 돌아 여러분 곁으로 왔습니다.…”라고 목청을 돋우면,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로 화답을 하거나 휘파람을 휙휙 불면서 환호해 주었는데, 더러는 “감질나게 그러지 말고 어서 서커스나 시작해라.”고 쏘아붙이는 이도 있었다. 우리 동네의 봄은 매번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서커스 트럭을 타고 왔던 것 같다.


 

서커스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구경을 못 한 채 천막 주위만 배회했다, 혹시라도 허술한 틈이 있는지 살피면서. 어머니에게 서커스 구경을 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어머니는 ‘철이 없는 기집애’라며 더 이상 말을 못 붙이게 했다. 그리고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당에 훽 뿌리셨다. 어머니의 속이 편치 않다는 표시였다. 

 

 

그 날도 나는 저녁밥을 일찍 먹고 매표소 근처를 서성대고 있었다. 천막 안에서는 끊임없이 탄성과 환호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고, 매표소 위에 총총히 매달린 만국기까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가을 운동회처럼 쏜살같이 달려 그냥 매표소를 통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때 누군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놀라서 돌아보니 우리 집 아랫방에 세 들어 사는 순경집 아줌마였다. 그 당시 순경들은 학생 지도 단속을 한다는 이유로 영화관이나 서커스장에 무료로 출입할 수 있었고, 나는 그 날 순경집 딸이 되어 마침내 서커스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마니를 깐 바닥에서 시큼털털한 냄새가 계속 올라왔지만 나는 꽤나 집중해서 보았다.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가 몸에 착 달라붙는 무대복을 입고 나와 한꺼번에 접시를 세 개나 돌렸고, 하얀 타이쓰를 입은 남자가 바닥에 누운 채 두 발로 자신의 덩치 세 배쯤 되는 나무통을 자유자재로 굴리기도 했다. 어느 단원은 외발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자전거 위에 한 발로 서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서커스의 클라이막스는 단연코 공중곡예였다. 내 또래의 소녀가 한 장의 꽃잎이 날아가듯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로 날아갔다. 그 모습은 정말 가슴을 졸이게 하면서도 경이롭고 환상적이었다. 반대편 그네에서 한 발만 걸친 채 손을 뻗고 있는 남자 단원이 혹시라도 날아오는 소녀의 손을 놓칠까봐, 모두들 목을 젖힌 채 위를 올려다보며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운 곡예라 할지라도 곡예사가 거뜬히 해내주길 바라고 또 믿는다. 그리고 곡예사는 그 믿음을 깨지 않는다. 소녀가 공중 곡예를 마치고 내려와 무대에서 인사를 했을 때 내 옆에 앉아있던 순경집 아줌마는 얼른 무대 위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에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아줌마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서커스가 오기를 기다렸을까. 환호할 그 무엇을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곡예사들의 반짝이는 의상과 진하고 화려한 분장, 아찔할 정도의 노출이 있는 무대복으로 인해 그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일상적인 삶의 공간을 벗어나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보는 일탈의 시공간, 그것이 바로 서커스의 매력이었다.

 

 

서커스를 보고 온 뒤로 그에 대한 꿈도 여러 번 꾸었다. 밤새도록 서커스 천막을 들추는 꿈, 내가 서커스단 소녀가 되어 그네 위에 서 있는 꿈, 어느 날은 서커스단장이 나를 붙잡으러 쫓아오는 꿈도 꾸었다. 아마 고아들을 잡아다 가둬놓고 식초를 먹여가며 서커스 훈련을 시킨다는 소문 때문이었을 게다.

 

 

나도 공중 그네 타기를 해야 했던 때가 있다. 어느 날 살고 있던 집이 은행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집주인이 우리 몰래 담보대출을 잔뜩 받아 챙기고는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다. 남편은 바다 위에 있었고 그가 돌아오려면 반년도 더 기다려야 했다. 이제껏 모아놓은 돈을 거의 날릴 위기였다. 내가 무사히 반대편 그네로 날아갈 수 있을까. 그 옛날 공중 그네를 타던 내 또래 여자 애를 생각했다. 그 아이가 곡예를 무사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믿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 같았다. 겁 낼 것 없다고, 그동안 해온 ‘인생살이 연습’이 네 손을 잡아줄 거라고 내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 일을 겪으며 나는 알게 되었다, 어떤 일에 목숨을 건다는 것은 스스로 삶의 고리 하나를 만드는 것이며 그것이 그를 붙들어준다는 것을.

 

 

비오는 날, 서커스 천막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제 손바닥에 받으며 놀고 있던 서커스 소녀를 본 적이 있다. 공연이 없던 그 날, 소녀는 심심했을까, 즐거웠을까, 아니면 울적했을까. 떨어지는 빗방울을 제 손바닥에 무사히 받아내면서 소녀는 어쩌면 아슬아슬한 공연 뒤에 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서커스를 두고 극한직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삶의 극한에 서지 않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울고 싶어도 웃어야 하고, 쉬고 싶어도 다음 공연이 기다리고 있고, 지낼 만하면 다시 짐을 싸서 옮겨 가야 하는 우리네 삶 또한 서커스단의 행로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 누구나 제각기 다른 역을 맡고 있을 뿐, 우리 모두 어릿광대가 아니겠는가. 오늘도 오늘 하루치의 연습이 기다리고 있는.

 

 

 

 

 

와사비 맛에 울다

 

 

 

 

 

결과라는 것은 그 내용에 관계없이 언제나 두려움을 준다. 결과의 뒤편에는 마치 깍두기형님처럼 보이는 ‘변경 불가, 의심 사절, 번복 금지’라는 놈들이 줄지어 서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발바닥까지 내려와 있는 심장을 디디며 나는 병원 복도를 걸어갔다 

 

 

유난히 얼굴이 흰 의사가 의자를 내어주며 앉으라고 했다. 그가 컴퓨터를 켜고 마우스로 몇 번 클릭하는 동안, 나는 마치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온 것처럼 목이 조여 오면서 숨이 찼다. 그 때 깃털이 많이 빠지고 한쪽 모서리가 일그러진 날개들이 모니터에 줄지어 나타났다. 모두 내 어머니의 폐 사진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폐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머니의 등이나 젖가슴을 보는 것과 달랐다. 어머니가 우리 몰래 다스려온 가슴 속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 이 부분이 희끗희끗하죠. 염증이 심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군데군데 허연 반점이 보이고 왼쪽 폐는 모양도 온전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좌우 비대칭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살다보면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는 거라고. 그것은 삶의 균형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삶은 그런 보편적인 삶의 원칙에서도 예외였다. 벅차고, 슬프고, 막막하고…, 그러다 이젠 ‘숨차고’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어머니가 젊었을 적에 오랫동안 미싱 공장 같은 델 다니지 않았느냐고 의사가 느닷없이 물었다. 검사 결과가 나쁘다는 뜻이었다. 말끔한 외모를 가진 의사는 검사 결과도 깔끔하게 한 문장으로 간추려 말해주었다. 환자는 지금 폐 세포가 서서히 굳어져 가는 ‘간질성 페렴’을 앓고 있다고. 굳어져간다는 것은 물기를 잃어간다는 것이며. 서서히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의미다. 잔뜩 굳어버린 식빵, 가뭄에 바짝 말라버린 논바닥, 고사목(枯死木)…, 그런 이미지가 한 순간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언제나 평온한 목소리로 잘 지내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했다. 쓰러져 입원하기 전날까지도 연기는 완벽했다. 기어이 우리 육남매를 ‘불효막심한 것들’로 만들고 나서야 어머니의 연기는 일시 정지되었다. 

 

 

보호자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머니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시동이 걸린 중고차를 몰고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는 소리였다. 차의 생명은 엔진이라고 하는데 어머니의 차는 ‘폐’라는 엔진에 이미 결함이 생긴 상태다. 고막에 난 구멍 때문에 다른 차의 경적 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며, 무릎 관절염까지 앓고 있어 어머니의 차는 평지에서도 자주 멈춰 설 것이다. 얼마 전부터 이른 새벽이면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든다고 하니 이것은 또 무슨 조짐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차에는 너무 많은 게 실려 있다. 자식에 대한 걱정과 자식의 자식에 대한 걱정, 그리고 자식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안간힘까지.

 

 

코 고는 소리가 작아지니 오히려 불안했다. 오르막에서 어머니의 차가 뒤로 밀리고 있는가 싶어서. 어머니는 간간이 급정거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엑셀레이더를 너무 세게 밟는지 갑자기 코고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아직은 당신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는 걸 나에게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침에 나온 병원 밥이 너무 밍밍한 것 같아, 점심때는 일식집에 가서 초밥을 사왔다. 밥 위에 얹힌 생선회가 반지르르 했다. 젓가락을 든 어머니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스테로이드라는 약에서 오는 부작용이라고 한다. 갑자기 초밥 하나가 내 입 속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내 입에 초밥 하나를 넣어주신 것이다. 눈물을 참으려고 어금니로 지그시 초밥을 눌렀다. 밥알의 온기가 느껴졌다. 따뜻한 밥알에는 일상의 평온함이, 얹혀 있는 회 한 점에는 쫄깃한 행복감이, 살짝 배어든 간장에는 인생의 짠 맛이, 그리고 와사비 속에는 인생의 매운 맛이 들어있는 듯했다. 그 중 혀끝에 가장 오래 남는 맛은 와사비 맛이었다.

 

 

슬픈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폐 기능이 약해진다고 한다. 사십대 초반에 남편을 잃은 것도, 당신 혼자 힘으로 여섯 아이를 길러야 했던 부담감도, 가끔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에게 느낀 절망감까지 어머니에게는 모두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 슬픔이 고스란히 어머니의 폐로 들어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폐는 절반 정도가 제 기능을 잃은 상태라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길에서 멈춰 서 버린 어머니의 중고차, 그리고 맥없이 흔들리며 견인차에 끌려가는 차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입안이 맵고 목이 따가웠다. 속에서 와사비 맛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머니를 보살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열 추적 미사일’이 되어 끊임없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바로 누워도 모로 누워도 피할 수가 없었다. 보호자 침대 바닥에 자꾸만 땀이 찼다. 침대도 나의 불효를 봐줄 수가 없다는 듯이.

 

 

 다음날 아침, 옆 병상의 환자가 웃으며 말했다. 새벽녘에는 모녀간의 코골이 합창이 요란했다고.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는 어머니의 차를 아마 내가 뒤에서 밀어 올리느라고 그랬을 것 같다.

 

 

 

 

 

 

 

전봇대는 아프다

 

 

 

 

 

칠십대의 노점상 할머니가 대통령의 가슴에 기대어 울고 있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매일 자정쯤 시장에 나와 열 두 시간동안 시래기와 무청을 주워 팔아도,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우는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대통령의 표정도 무척 착잡해 보였다.

 

 

사는 게 너무 고달파서 한바탕 울고 싶던 사람들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사진이다.  사진 속 배경이 된 배추더미는,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잠깐 잠이 든 시장 상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졸린 눈빛으로 배추를 내려다보던 알전구들은 갑작스런 대통령의 행차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새벽이라기엔 어둠이 너무 두터워 보여 아침이 쉬 올 것 같지 않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그러하듯이.

 

 

국민소득이 십 년 만에 최대 폭으로 감소했다더니 어느 노숙자는 따뜻한 교도소에 가고 싶어 일부러 절도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 세상이 마치 빈 쌀독처럼 느껴진다. 내가 정말 복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어른들 말 때문에 자다가도 가위에 눌리곤 했었는데, 어른이 된 뒤로는 걸핏하면 경제 위기나 구조 조정을 들먹이는 사회 분위기에 눌려 나도 모르게 소심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 정말 이 힘든 시절을 병풍 접듯이 쉽게 접을 수는 없는 걸까.

 

 

이런 상황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전봇대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급매, 급전세라는 전단지를 바람에 흔들어 보이며 점차 부동산 값이 하락할 거라고, 눈물의 고별전이니 ‘창고 대방출’이라고 적힌 전단지를 내걸며 몇 개의 공장과 회사가 곧 문을 닫을 거라고 귀띔해 주었던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보고도 무시했거나 무신경하게 보았을 뿐이다. 여기저기 남아있는 벽보 테이프 자국과 떼다만 전단지 자국, 그리고 남의 전단지 위에 겹쳐 놓은 구직 광고를 보니 왠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손 닿는 데까지 전봇대에는 빈 곳이 없다. 힘든 이들이 그래도 믿고 의지할 데는 전봇대뿐인 모양이다. 그래서 전봇대는 세상을 읽어주는 책이 되고 있다. ‘빈 방 있음’, ‘법원 경매’, ‘하숙생 구함’, ‘무담보 싼 이자’, ‘아기를 봐 드립니다’, ‘치매환자 돌봐드림’, ‘명문대 출신이 명문대 보장’ 등. 전단지들끼리 서로의 끝을 잡아주며 세상의 바람을 견디고 있다, 이런 게 가족이라는 듯이.


 

전봇대에 이 시대 가장(家長)들의 모습이 들어있다. 전봇대가 어깨에 둘러맨 덩치 큰 변압기는 가장들이 먹여 살려야 할 부양가족으로, 전봇대가 열 손가락 벌려 붙들고 있는 전선줄은 가장들이 보살펴야 할 부모 형제와 친지로 보인다. 끊임없이 전단지가 날아드는 것까지 닮았다. 공과금 고지서, 관리비 납부서, 보험료 청구서, 학원비 봉투, 공납금 납부용지 등.

 

 

전봇대의 하루는 참는 것에서 시작되어 참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느닷없이 돌을 던져 전봇대의 전등을 깨는 사람, 다짜고짜 전봇대의 아랫도리를 걷어차는 사람, 전봇대의 종아리에다 질금질금 오줌을 싸는 술 취한 남자들까지. 아마 이 시대의 가장들도 자신의 ‘전봇대’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참아내고 있을 것이다. 제 식구들에게 하루 세끼 밥이라도 먹이려고, 자식들 하던 공부라도 제대로 마치게 해 주려고 오늘 하루도 부처님보다 예수님보다 더 많이 참으면서 견디고 있을 것이다. 너무 낡고 삭아서 뽑아내기 전에는 바닥에 드러누울 수도, 그 어디에 기댈 수도 없는 전봇대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가장(家長)들이다. 바람이 세차게 부니 전선줄들이 일제히 요동을 친다. 그 순간 전봇대는 전선줄을 더 팽팽히 부여잡는다.

 

 

때로는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들이 시합을 마친 권투선수가 몸에 잔뜩 부치고 있는 ‘파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봇대처럼 의연하게 보였겠지만, 이 시대의 가난한 가장들은 그동안 자기 몸 하나로 맞고 때리며 돈을 벌어 왔다. 권투가 위험하다고 링에 오르지 않는 복서는 없다. 맞고 또 맞아도 위축되지 않으며 상대방의 주먹 속으로 더 파고드는 게 복서다. 어쩌면 그는 지금 이 시간에도 찢어진 눈덩이를 손으로 가린 채, 다음 시합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는지 모른다.

 

 

번개탄 두 장을 집어 삼키고도 불이 제대로 붙지 않는 연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대장간에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무쇠덩이를 쇠망치로 두들겨 연장을 만든다. 쇠망치로 내려칠 때마다 쇠가 단련되기 때문에 백번 이상을 두들겨야 좋은 연장이 된다고 한다. 우리의 경제 상황이 이렇게 힘들어진 것도, 어쩌면 우리를 좋은 연장으로 만들기 위해 하늘이 두드리고 있는 게 아닌지. 아프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희망이 살아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전 직원이 아침부터 전봇대에 올라가 수리를 하고 있다. 한 시간도 더 되었다. 전봇대가 많이 아픈 모양이다. 

 

 

 

 

 

 

 

착지(着地) 

 

 

 

 

 

갖다놓은 보리차 한 병이 어느새 다 비워져 있었다. 내가 다가서는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남편은 벽을 향해 누운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적요였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가 있는 듯이 보였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천리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하던 그가 슬며시 수저를 내려놓으며, 아무래도 이번 시험도 제대로 못 본 것 같다고 했을 때, 나는 그저 수험생 특유의 엄살이려니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짙어져갔다. 배가 고프지 않다며 점심을 거르더니 급기야 안방 벽 아래에 길게 누워버린 것이었다. 남편만을 이 세상에서 오려내어, 거기 침대 위에 얹어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 위로 누군가 절망이라는 소금을 켜켜이 뿌려둔 것 같았다. 

 

 

그가 외롭고 힘든 승선생활을 이십 년 이상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속에 도선사가 되려는 꿈이 있어서였다. 도선사란 부두로 입항하거나 부두에서 출항하는 선박을 안내하고 접안과 이안을 지휘하는 사람이다. 육천 톤 이상의 선박에서 오년 이상을 선장으로 근무한 사람들만이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기에, 그 시험을 치러온 사람들은 대개 사십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있다. 집 주소와 집 전화번호도 가물가물해 지는 나이, 냉장고 문을 열고도 자신이 뭘 꺼내러 왔는지 한참 생각해 봐야 하는 나이. 팽팽하던 자신감도 오래 입은 팬티 고무줄처럼 어느덧 느슨해지고, 끓어오르던 삶의 의욕마저 잠잠해지기 시작하는 나이다.

 

 

무더운 칠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 시험을 치러갈 때마다 소매가 긴 옷을 꺼내 입었다. 자꾸 한기가 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은 응시생이 그렇게 입고 오더라고도 했다. 한여름에 소매 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온종일 벌벌 떨어가며 치는 시험이라니…


 

오랫동안 시험공부를 해온 그였기에, 제 때 원서나 내고 시험 치는 날짜만 놓치지 않는다면 재깍 붙을 시험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도선사라는 열매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가 두 번째 시험을 치러갈 때만 해도 나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보소, 장대 길이가 좀 짧다 싶거들랑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보소. 그러면 안 되겠능교.”

 

그의 장대가 짧았던지 아니면 휘두르는 힘이 약해서였는지, 그는 다시 낙방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짐을 꾸려 바다로 되돌아갔다.


 

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지운 이는 어쩌면 바다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직은 바다가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그러는 동안 내 마음 속에 한 가지 믿음이 생겨났다. 그를 위한 열매가 아직 그대로 매달려 있을 거라는 믿음이, 성실한 그를 위해 신(神)이 어느 가지 끝엔가 까치밥 하나쯤 남겨두었으리라는 믿음이.

 

 

그가 오랫동안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도선사가 안 되어도 좋으니 더 이상 고생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그의 충실한 러닝메이트가 되겠다고 약속은 했었지만, 사실 나는 그를 돕는 협력자가 아니었다. 나야말로 남편을 입시 감옥에 감금해둔 채 절대 풀어주지 않은 냉정한 형리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가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할까봐 오며가며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감옥 안의 그가 몸을 비트는 기미라도 보일라치면 나는 얼른 감옥 안을 향해 속삭여대곤 했다, 당신은 곧 풀려나게 될 거라고. 이를테면 ‘희망 고문’을 했던 셈이다.


 

절망이라는 나무는 하루 만에 다 자라는 나무였다. 아침나절만 해도 어린 줄기를 보이던 나무가 저녁 무렵에는 어느새 온 집에 절망의 가지를 드리울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 가지에 열린 회한의 열매를 보았다. 그가 만일 이번에도 낙방을 한다면 아무래도 나의 박덕함 때문이리라. 내가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보았다, 잔뜩 모양이 일그러진 채 시퍼런 빛을 띤 분노의 열매를. 보상 받지 못한 노력, 그리고 열외로 밀려났을 때의 소외감이란 것도 오래 묵혀두면 분노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지에 매달려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체념의 열매들, 나는 그 앞에서 다시 목이 메었다. 나도 그냥 누워버리고 싶었다, 그 절망의 나무 아래에.

 

 

두려움과 막막함이 만드는 격자무늬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밤이었다. 날이 밝으면 시험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그의 고생을, 물고기 입에서 뽀글대며 올라오는 기포 몇 방울마냥 그냥 날려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처 입은 한 마리 짐승처럼 웅크린 채 눈도 뜨지 않는 그를 다시 바다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상을 펴고 정한수 한 그릇을 올렸다. 집에 있는 과일도 모두 꺼내어 씻은 뒤 상에 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 엎드렸다. 정한수 한 그릇보다 더 많았을  그의 땀을 부디 기억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붉은 과육 속에 또렷이 들어있는 씨처럼 그의 오랜 노력이 부디 결실을 맺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사람도 남들처럼 땅을 디디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신이 원하신다면 나는 그를 위해 기꺼이 노둣돌이 되겠노라고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와 한솥밥을 먹고 그와 한 이불속에 잠들기를 감히 바란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 제발 저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떼를 썼다.

 

 

쉼 없이 절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양쪽 허벅지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져왔다. 이제 그만 조르고 바위처럼 침묵한 채 있어보라는 신의 말씀 같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군가 그의 낙방을 위로하기 위해 한 전화일 듯싶었다. 망설이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기 해양수산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


 

그것은 이제 그가 땅 위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망망대해가 아닌 땅위에서 자동차도 보고 사람도 보고 꽃과 나무도 마음껏 보며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고맙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합격을 알려준 그 사람이 고마웠고, 또록또록한 음성을 무사히 내 귀까지 전해준 우리 집 전화기도 고마웠다.

 

 

전화기를 든 채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어느새 거실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두 다리가 먼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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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 졸업

 

2000년 《에세이문학》에 <밥>으로 등단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수필 <풍로초> 당선

 

2006년  제24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소금쟁이 연가》(2005)

 

 

 

 

 

 
  • wild rose 2019.10.07 03:47

    난 수필가 정성화 님을 좋아한다. 왜냐면 글이 글이 쉽게 읽히면서도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성화 님의 글을 읽으면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이 가슴까지 따뜻한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