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일기

금.08.16.2024. 어린 시절 나를 되돌아 본다.

wild rose* 2024. 8. 17. 21:40

Fame - Irene Cara: with Lyrics(가사번역)

 

아름다운 자연은 좋아하지만 그곳에 함께 하는 벌레들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힘듦이 싫다. 어떤 이들은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르면 보람을 느끼고 정복한 쾌감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몫이라서 다행이고 대신에 나는 영상으로 대리만족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감사이다.

 

농사를 지어 채소나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느끼고 정말 부럽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 어려워서 불가능하다고 느껴서 인지 대신에 그들의 농산물을 감사히 사서 맛있게 요리를 하는 과정이 더 관심이 가고 보람을 느끼며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운동이 좋다고 하고 정말 좋은 게 맞음을 안다. 그런데 난 그것을 억지로는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아직도 운동을 거의 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백 번의 스토리를 들을 때 한 곡의 노래를 듣지만 나 초등인지 중 1인지? 텔레비전에서 톤 존스 쇼를 해 주었는데 그 쇼는 밖에서 놀다가도 급히 서두를 정도로 꼭 챙겨 봤고 그 후 30년도 뒤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톰 존스가 공연하는 라이브 쇼도 봤다. 그때 톰 씨의 나이가 꽤 되었을 때인데도 정말 공연이 좋아서 즐거웠다. 울 아들이 당시 대학시절이었지 싶은데 쇼를 보기 전에 톰 존스에 대해서 잘 몰랐던 울 아들도 이제는 톰이 좋아졌다고 했다.

 

Fame이라는 미드도 나 아직 많이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방영을 했었고 그 미드를 할 때면 꼭 챙겨 봤었다. 지금은 그 내용까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Fame의 주제곡은 지금도 가끔씩 찾아 듣는다.

 

인생을 사노라면 때론 나 하고는 맞지 않은 여러 가지 것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맞추려고 노력도 하고 인내도 하겠지만 그래도 아니다 싶을 때는 잠시 뒤로 물러서 있으며 기회를 보거나 굽어질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난 부러져 버리는데 그것은 나의 단점이 분명하다.

 

능력을 가진 이들이 때때로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인성이 좋아 보이는 이들에게 더 호감을 느끼고 나 자신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피아노, 노래, 그림, 손재주 등에 뛰어난 이들 혹은 지식이나 권력이 높거나 말재주가 있어서 상대를 말로 제압할 수 있는 등등의 능력을 말한다.)

다른 추억은?

나 어려서 동네 친구들이 많았다. 그중에 친구 양희도 있었다. 양희는 성희, 정희, 복희라는 세 언니들이 있었고 나처럼 넷째 딸이었는데 나에게 있는 두 오빠는 없었지만 그녀도 남동생 두 명이 있었고 양희 바로 아래 남동생은 내 바로 아래 남동생하고도 친구이었다. 또 그녀의 엄마는 독실한 여호와 증인 신도이었고 양희 부친은 부장 판사이셨다. 가끔씩 양희네 집에 놀러 가면 양희엄마께서 집에서 카스텔라를 궈서 한쪽씩 주시기도 하였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양희는 초등 졸업 이후 보지 못했다. 나와 나이는 같았지만 내가 한 학년이 더 높아서 나 중학생이 된 후로 아마도 멀어지게 되었지 싶다. 내 남동생 친구는 나중에 자기 부친처럼 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울 부친 유언장 작성 시에도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수년 전에 하늘에 별이 되었다고 했고 양희는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막내 남동생도 의사라고 했고 또 그 위 언니도 의사라고 했는데 맨 첫째 딸은 남편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 와서 여호와 증인 단체에서 꽤 중요한 일을 한다고 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또 다른 기억은?

 

친구들이 울 집에 자주 놀러 왔고 난 친구들 집 방문은 별로 해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는 나는 나 스스로 친구를 사귀는 것을 잘 못했고 안 했다. 지금 친한 거의 모든 친구들이 나와 가까워지려고 먼저 다가왔고 그들을 내가 잘 받아 드렸는데 그렇다고 친구들의 호구는 아니었다. 사귀어 봤을 때 아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관심 무이었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내 자신 너무나 평범 그 자체이었기 때문에 나처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을 더 좋아했고 또 내 능력과 비슷한 친구들과 너무나 평범한 즐거움을 느끼며 살았던 소년청년 시절을 보냈다. 또한 손위 언니들은 나를 꼬마로 생각해서 자기들끼리 많이 놀았고 바로 손위 오빠는 정신연령이 좀 높아서 손위 누나와 더 친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두 남동생들하고 훨씬 더 가까웠고 또 두 남동생들에게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대장이다. 동생들 역시도 누나인 나에게 그때도 지금도 깍듯하다. 어려서도 동생들을 오히려 내가 귀찮게 하면 바로 아래 남동생은 좀 쫓아오다 마는데 7살 아래인 지금 직업이 목사인 울 막내 남동생은 골목을 두 바퀴도 더 돌 정도로 끈질겨서 내가 도망하느라 힘들었던 기억도 난다. 도망을 간 이유는 내가 귀찮게 굴었음을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ㅎㅎ...

 

학창 시절 공부는 안 해서 못했어도 항상 선생님들께 신용이라는 것을 받았는데 이유는 하교 후 과외수업을 받는 몇 안 되는 과외학생 중에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과외는 가정환경 조사서를 선생님들께서 주욱 살펴보고 환경이 좋아서 과외비를 낼 정도의 학생들을 7-8명 정도 골라서 시켰지 싶은데 어느 날은 음악선생님도 불러서 가보니 레슨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치기 싫어서 끊었던 피아노 레슨을 고교시절에 다시 몇 달 더 받은 기억이 난다. 초 5 때 졸려서 과외 수업 중에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는데 내 차례가 되어서 선생님이 질문을 하셨고 철의 장막에 대해서 답을 하라는 것을 내가 꿀잠을 자다가 감긴 눈으로 객관식 4개 답 중에서 고른 답이 철로 만들어진 벽을 골라서 모두를 웃긴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난다.

 

울 외할머니께서 겨울이면 꼭 3-4개월 정도를 외조모님의 둘째 딸네 집인 울 엄마 집에 다니러 오셨는데 그때 울 부친께서는 아침 출근 시 주머니에 있던 잔돈들을 다 꺼내서 외할머니 복주머니에 담아 주셨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울 부친께서 몇 뭉탱이씩 돈을 놓고 헤아리실 때 나도 해 보고 싶다고 하면 울 부친께서는 단 한 번도 노를 안 하시고 웃으시며 꼭 한 뭉텅이씩을 내 손에 쥐어 주셨다. 난 그것을 헤아리며 어려서부터 연습을 해서 인지 지금도 돈은 엄청 잘 헤아리며 유일하게 울 부친의 8남매 중에 나만이 부친의 뒤를 이어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울 막내 동생 3-4살 때 외조모님이랑 바둑을 두거나 오목 아니면 손가락으로 바둑알 따먹기를 했을 때 곁에서 짓궂게 훼방을 놓는 일을 잘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 아직 어려서 7-8살 일 때 울 집에 놀러 왔던 언니친구들이나 오빠 여사친들이 스타킹을 신고 오면 내가 곁에서 스타킹을 착용한 다리를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그녀들을 많이 곤란하게 했다고 한다.

 

울 큰언니는 지금도 당시의 어린 나를 기억하며 웃으시는데 흠~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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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근을 하니 울 아들이 필리핀미국아줌마들 4명에게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카운터 앞에 서 있던 그녀들의 뒤쪽으로 걸어가서 내 자리로 들어갔는데 그녀들은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굉장히 즐겁게 바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들이 나간 다음에 울 아들이 그랬다. 오전에 조금 바빴는데 다들 좋은 고객들이어서 괜찮았다고~ 방금 그 고객들도 4명이서 5백 불 넘게 구매를 했다고 했다.

 

엊그제 수요일 아픈 아들은 오후 3시 무렵 일찍 퇴근시키고 엄마도 몸이 아프면서도 정리를 끝 마치고 간 실버를 많이 팔았다고 했다. 아들도 엄마의 수고를 느꼈는지~ 표정으로 엄마 최고야! 하는 듯한 모습이 느껴졌다.

 

오늘도 아들이 맥아침을 사 왔다고 했지만 나는 준비해 갔던 도시락을 먹어서 아들이 귀가 시 가지고 가고 나는 일을 조금 더 하다가 6시 45분 무렵에 빌딩에서 나와 퇴근을 했다. 맥아침은 남편이 먹었다고 한다.

 

저녁 식사는 남편표 굴비 한 마리와 김치찌개 조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