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좋은 글들

비오는 홍콩- 이현주

wild rose* 2016. 12. 30. 23:14

비가 오는 홍콩/이현주

 

 

미혜가 홍콩여행을 제안했을 때, 마침 나는 어디론가 떠나는 배가 있으면 무조건 올라타고 싶던 참이었다. 쉼 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지는 고달픈 일상을 팽개치고 친구의 출장길에 따라나섰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 미혜는 홍콩대학에 일을 보러 가고 나는 방에서 혼자 뒹굴었다. 희한하게 나는 어디를 가던 비를 잘 만난다. 그래서 터미널이나 공항은 젖어있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빗줄기는 어제보다 더 심해져서 밤처럼 깜깜한 하늘에 천둥번개까지 때린다. 저 멀리 아트센터 너머 바다는 잿빛으로 출렁이고 길 건너 페닌슐라호텔의 고풍스러운 옥상기둥은 어둡게 젖어있다.

우산을 챙겨들고 거리로 나섰다. 대로변의 상점들을 구경하면서 걷다가 샤넬No5가 진열된 향수가게 앞에 멈추어 섰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외국 출장길에 샤넬No5를 선물로 사다주셨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임에도 고급스러운 물건을 좋아하고 쇼핑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출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체중이 몇 킬로씩 줄어 있고 당뇨병이 악화되기도 했다. 선물을 사기 위해 여러 날을 싸구려 식빵과 물로 연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샤넬No5의 투명한 유리병은 아름다우면서 견고한 느낌이다. 안에 담긴 액체의 연한 갈색 빛도 뭔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 점원이 내 손목에 뿌려주려는 것을 사양하고 우산 안쪽에 한 방울 떨어트리고 가게를 나섰다. 샤넬의 향기는 우산 속을 맴돌며 어둡고 눅눅한 공기의 낯선 거리를 내내 따라왔다. 허전한 어깨에 둘러진 것이 뭔지 알기 전에 포근함이 먼저 와닿는 것처럼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도회적이면서 인공적인 샤넬 향기는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향수는 보통 3단계로 향이 변하면서 가벼워지는데, 첫 향과 끝 향이 줄기차게 강렬한 것도 짧은 삶을 열정적으로 살다 간 아버지와 닮았다.

 

스타의 거리로 가는 길목에서 데미테르향수 매장을 발견했다. 입구 가까이에 진열된 병을 열어 향을 맡고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궂은 날씨를 위로하듯 햇볕에 잘 마른 빨래 냄새가 났다. 향수의 이름은 세탁기였다. 이만 원 안팎의 중저가 브랜드인 데미테르는 기존의 향수와 다른 차원으로 감성을 공략한다.

대개 향수는 독약’ ‘마녀등의 도발적인 명사나 해변의 키스같은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이름으로 그 향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연출한다. 반면 데미테르의 향수 이름은 천둥, 젖어있는 정원, 장의사, 도서관하는 식으로 장소나 현상을 명시한다. 페인트, 크레용, 눈물, 모래 냄새 도 있다. 뉴질랜드, 아프리카 같은 나라도 있고 헬로키티, 피터팬 등 캐릭터도 있고 초밥, 오이, 초코칩 쿠키도 있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향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속의 냄새를 재연해서 그것에서 비롯된 상황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향수의 이름만 봐도 시간 여행이나 순간이동을 할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된다.

익숙해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거나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그 순간을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혹은 무었을 했는지에 따라서 특별한 의미로 저장되기도 한다. 크레용이나 페인트의 냄새가 기분 좋은 향기는 아니지만 기억하고 싶은 어느 순간으로 데려다주는 단서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은 행복한 경험이 될 지도 모른다. 습도가 높은 날, ‘세탁기향으로 인해 마른 빨래를 개키던 기억이 떠오르며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딸에게 줄 ‘first kiss’ 한 병을 사들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어젯밤 바다건너 홍콩 섬의 야경은 화려했는데 지금은 꿈을 꾸는 것처럼 회색으로 젖어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출장길에 보내준 엽서 중에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 풍경도 있었다.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온 아버지와 나는 생각지 못한 어느 지점에서 이렇게 문득 마주치곤 한다. 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이국의 바닷가에서 나에게 엽서를 쓰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엄마 지금 홍콩 바닷가에 와있어. 비 오고 바람이 불어서 조금 추워. 보고 싶다. 우리 딸.’

열여덟 살 내 딸도 세월이 흐른 후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 딸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는 나를 만날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며, 작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혼자 커피를 마시고 또 빗길을 걸었다. 새로운 것을 대하는 마음은 늘 아릿하다. 수없이 많은 만남이 이별과 그리움으로 이어졌는데 내가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 적도 없고 떠나간 사람이 돌아온 적도 없다. 샤넬과 커피 향과 물비린내가 어우러지는 홍콩 바닷가의 이 시간도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서 어제 보아둔 하얀 샌들을 사려는데 전철역에 도착해 있다는 미혜의 전화가 왔다. 서둘러 밖으로 나와 우산을 펴는 순간 벌써 사라진 줄 알았던 샤넬의 잔향이 가볍게 진동했다. 하늘은 아직 흐리지만 비는 거의 그쳐간다.